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25]

양기화
발행날짜: 2015-03-10 05:43:10
  • 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파스텔 톤의 도시 리스본(2)

세 번에 걸친 지진과 해일 그리고 화재를 기적적으로 이겨낸 건물도 있었다. 테주강가에 있는 벨렝탑과 제로니모 수도원, 1748년에 개통된 58km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수로교, 그리고 상파울루 거리에 있는 주조소(鑄造所)였다. 특히 주조소가 지진을 견뎌냈을 뿐 아니라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금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지 않은 것은 포르투갈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지진으로 무너진 감옥에서 수백 명의 범죄자, 탈주병 그리고 노예들이 빠져나와 약탈과 방화,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조소를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버리고 열여덟 살쯤 된 젊은 병사 하나가 꿋꿋하게 자리에 남아 금화 200만냥을 지켜냈던 것이다.

천지가 뒤집히는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맡은 임무를 다한 젊은 병사의 용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젊은 병사가 지킨 금화는 유럽 각국에서 답지해온 지원금과 함께 리스본을 재건하는데 소중하게 쓰일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 마흔에 나라를 다스리는 골치 아픈 업무보다는 화려한 오페라공연과 신나는 사냥을 더 즐기던 주제1세Jose I)는 폐허가 된 리스본을 버리고 코임브라, 심지어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기자는 신하들의 말에 흔들렸다.

하지만 뒷날 폼발 후작으로 더 알려진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ao Jose de Carvalho e Melo)를 접견하고 "하느님께서 내리신 이 형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죽은 자를 묻고 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라는 답변을 듣고 카르발류로 하여금 아수라장이 된 리스본을 구원하도록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운명의 날 35쪽, 에코의 서재, 2009년) 지금의 리스본을 보면 상상도 되지 않을 당시 리스본의 참상은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도후쿠지방을 강타한 진도 9.0의 지진과 해일의 참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르발류는 "11월 1일은 리스본이 지진과 화재로 완전히 파괴된 날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에게는 왕실 재원과 개인 재산을 비롯해 폐허를 딛고 일어설 재원이 충분히 있다."라는 짤막한 메시지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시체를 처리하고 식량을 공급하며 전염병을 막았다. 덕분에 리스본 시민들은 엉망이 된 일상을 조금씩 수습하기 시작했다.

카르발류는 일흔여덟 살 된 포르투갈의 수석도시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아(Manuel da Maia)에게 리스본 재건의 책임을 맡겼다. 군생활을 통하여 군사와 예술, 요새학 등에 정통한 마이아는 수도교건설을 비롯하여 왕궁과 왕실건물들을 정비하는 등, 리스본에 대한 도시공학적 조사를 수행해왔기 때문에 리스본 재건의 적임자였다. 지진이 일어난 두 달 뒤, 마이어는 모두 다섯 가지의 리스본 재건 기획을 왕에게 제출했다.

폐허의 잔해들을 이용하여 옛 리스본과 유사한 모습으로 재건하는 방안으로부터 아예 지진의 잔해들을 싹 밀어내고 새로운 거리를 마음껏 조성하는 방안, 리스본 인근의 벨렝 지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방안까지 다양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호시우광장과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을 남북 축으로 한 격자모양의 재건축도면이었다. ‘질서와 진보’라는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을 합리적인 도시계획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노브르스 거리, 즉 귀족의 길이라 불리는 세 개의 대로가 두 광장을 연결했고, 일곱 개의 직선 도로가 대로들을 가로질렀다. 좁고 구불구불한 옛 리스본의 거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로는 가슴이 뻥 뚫릴 만큼 넓어 보였다고 한다. 왕궁이 자리 잡았던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은 왕궁이 있던 서쪽에는 무기고를, 동쪽에는 세관건물을 그리고 북쪽에는 민사법원을 배치하고 남쪽을 비워 테주강 쪽의 전망을 열어 놓았다.

세 개의 노브르스 거리 중 중앙 대로에는 개선문을 배치했으며,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의 중앙에는 주제1세의 기마상을 만들었다. 두 광장 사이에 조성된 건물들은 상공조합별로 배정하였다. 1775년 봄, 지진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전체 지구의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주제1세의 기마상이 완성되자 동상 제막식을 겸하여 공식적인 축하행사를 열었다. 주제 1세의 예순한 번째 생일인 6월 6일의 일이다. 기마상은 포르투갈의 천재 조각가 조아킹 마샤두 드 카르트루(Joaquin Machado de Castro)가 제작을 맡았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고 흔들리는 포르투갈 사회를 안정시키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은 카르발류는 주제1세의 죽음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그가 추진한 과감한 개혁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뉘었던 모양이다.

카르발류의 전기를 쓴 케네스 맥스웰은 카르발류에 대한 이중적 평가를 이렇게 정리했다. "1750년부터 1777년까지 포르투갈을 사실상 통치한 폼발은 어떤 사람에게는 계몽절대주의를 펼친 위대한 정치가로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1세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같은 군주들에 비길만한 인물이었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얼치기 철학자이며 잔인한 폭군일 뿐이다."

카르발류는 1934년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에 의하여 포르투갈의 영웅적 정치인으로 재평가되었다. 영웅도 시대를 제대로 만나야 그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고, 인정을 받게 되나 보다.

호시우광장과 코메르시우 광장을 잇는 노브르스 거리(좌)와 가로지르는 거리를 지나는 전차(우)
완공 당시에는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넓어보였다는 노브르스 거리는 명동의 거리보다 좁아보였지만, 이어지는 아케이드가 깔끔한 인상과 함께 한가롭기까지 하다. 노브르스를 가로 지르는 길을 건널 때는 전차가 달려오지 않나 살펴보아야 한다. 건설한지 100년도 넘었다는 전찻길을 달라는 전차들 가운데는 나무로 된 것도 있다고 한다.

영국 출신 작가 존 버거가 유럽의 여러 장소에서 죽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독특한 형식의 단편소설을 묶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 리스본의 전차가 등장한다. 존이 리스본에 갔을 때 엄마를 만난다. 왜 리스본에서 나를 기다렸냐고 묻는 존에게 엄마는 전차가 다니는 몇 안 되는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존이 어렸을 적에 엄마와 함께 전차를 즐겨 탔는데, 다리가 불편한 엄마가 힘들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위층의 맨 앞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앞자리에 앉아 전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특히 모퉁이를 돌 때가 제일 폼을 잡았다고 한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필자에게 특별한 느낌을 남겼다. 주인공 존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사람이 죽으면 지상에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저자는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장소는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인 것이다.

주인공은 오월의 끝자락에 포르투갈 사이프러스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리스본의 어느 광장에서 우연히 엄마를 만난다. "얼굴이 보이기 한참 전에 걸음걸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착하기 전에 앉을 생각부터 하는 그 걸음걸이. 내 어머니였다." 그렇다. 작가는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엄마를 제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 해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필자는 아예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코메르시우 광장 한복판에 서있는 주제1세의 기마상(좌)과 북쪽에 있는 개선문(우)
답답한 느낌이 들던 노브르스 거리의 끝에 있는 개선문을 지나는 순간, 널따란 코메르시우 광장이 펼쳐지면서 멀리 테주강을 건너 낮으막한 언덕을 지나 먼 하늘까지 눈에 거치는 것이 없다. '코메르시우광장은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늘 반쯤 빈 듯한 인상을 준다'라는 존 버거의 비유가 그리도 적절할 수가 없다.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주제1세의 기마상은 지금이라도 광장을 차고 튀어 나갈 듯하다.

광장을 지나 테주강변으로 다가가면 4월 25일 다리가 아스라이 보이고, 다리 건너편에는 105m 높이의 좌대 위에 서서 리스본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28m높이의 예수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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