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마드리드로 가는 길(1)
무언가 남겨 놓은 듯 아쉬움 속에 살라망카를 떠나 마드리드로 향한다. 마드리드로 가는 도로변에서 우거진 협죽도(夾竹桃)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핑크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보기에도 좋다.
중국에서는 대나무에 핀 복사꽃이라는 의미를 담아 협죽도(夾竹桃)라고도 하는데, 우리는 잎이 버들잎 같고 꽃은 복사꽃 같다고 해서 유도화(柳桃花)라고 부른다. 협죽도과에 속하는 넓은 잎 늘푸른떨기나무로 인도가 원산이다. 우리나라에는 1920년에 수입되어 제주도와 남부지방에서는 정원수로 심지만, 중북부지방에서는 관상용화분으로 키우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스페인에서 본 것처럼 가로수로도 심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 하지만, 유도화는 장미보다 더해서 치명적인 독성이 있다. 꽃과 잎, 뿌리, 줄기에 올레안드린(oleandrin)이라고 하는 독성물질이 들어있어 먹을 경우 구토와 복통을 일으키고 심하면 호흡곤란과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할 수도 있다. 독을 잘 다스리면 약으로 사용하는 법이다. 유도화의 잎은 협죽도엽이라고 해서 강심과 이뇨를 위한 생약제로 사용한다.
'중약대사전'에는 "맛은 쓰고 성질은 차며 독이 있다. 강심작용을 하며 이뇨한다. 담을 삭이고 천식을 멎게 하며 진통하고 어혈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다. 심부전, 천식해수, 전간, 타박상으로 인한 부종 및 동통, 폐경을 치료한다"라고 나와 있다.
유도화의 독성은 청산가리의 6천배에 이르는데 외국에서는 유도화 나뭇가지를 꺽어 젓가락으로 사용했다가 사망한 경우도 있고, 유도화 나무를 태운 연기를 마셔도 중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유도화 가지를 태운 연기로 적진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왔다고 하는데, 유도화가 1920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수입되었다면 신라시대에는 없었을 터이니 드라마 고증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위험한 나무가 도로변에서 무성하게 자라도록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가로수로 심는 이유는 야생동물들이 도로로 뛰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자동차 무서운 것은 잘 모르는 동물도 자연이 만들어 낸 유도화가 무서운 것은 아는 모양이다.
로드킬로 인한 교통사고의 위험도 줄이고 야생동물을 보호할 수도 있으니 추위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여 우리나라의 도로변에도 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협죽도에서 생즙을 내거나, 물에 달여서 만든 친환경농약을 이용하거나, 협죽도를 태운 연기로 하우스 내부를 훈증소독하는 등 친환경농업의 소재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마드리드에 가까워지면서 야트막한 산이 나타나더니 산세가 제법 험해진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반군측이 마드리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총공세를 펼친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전쟁은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측의 승리로 끝났다. 스페인 내전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다. 내용은 스페인 영토 안에서 일어난 내전이었지만, 전투는 국제전의 양상을 보였다. 소비에트 연방과 서방의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 여단이 반파시즘 진영인 인민 전선에 가담하였고,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과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프랑코의 반란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도시 노동자, 소작농 같이 자산이 없는 서민층은 물론 고학력 중산층들은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고, 가톨릭 성직자, 지주, 기업가들은 프랑코 반란군을 지지하여 계층이 대립하는 양상에 더하여 가톨릭세가 강한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역 등은 분리독립을 거부한 정부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 2월 총선 결과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한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 전선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한 것이 내전의 사회적 배경이다. 개혁정책으로 지주, 자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년)> <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전쟁은 많은 이야기를 남기는 법이다. 스페인 내전은 헤밍웨이를 비롯한 작가들과 피카소를 비롯한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피카소는 1937년 4월 26일 나치군이 보낸 24대의 비행기가 스페인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는 참상에서 영감을 얻어 '게르니카(Guernica)'를 그렸다. 당시 독일군의 게르니카 폭격으로 250~1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였다고 한다. '게르니카'는 1937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의 스페인 전용관에 설치되어 수많은 관람객들에게 공분을 일으켰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937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미국 몬태나 출신의 로버트 조던이 게릴라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성공하기까지의 3박 4일에 걸친 과정을 담고 있다.
조던은 라그랑하를 거쳐 세고비야를 점령하려는 골츠장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마드리드와 세고비아 사이에 위치한 과다라마 산맥에 위치한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현지에서 도와주기로 한 민병대의 속사정은 복잡해서 폭파작업이 순조롭지만은 않다. 민병대를 지휘하고 있는 파블로는 다리를 폭파한 다음에 반란군의 표적이 되어 공격을 받거나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스페인 내전의 구조를 그려볼 수 있다. 마드리드에 있는 정부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반란군이 집결하고 있고, 반란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민병대가 게릴라활동으로 반란군을 괴롭히는 형세인 것이다. 반란군 입장에서는 앞 뒤에 적을 두고 있는 셈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군이 마드리드를 넘겨주고 만 것은 전략적 판단을 잘 못한데 있었을 것이다. 노엄 촘스키는 공화국 정부가 군사 반란만큼이나 무장한 민병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반란군에 민병대가 희생되는 것을 방관하였던 것이 패인이라고 분석하였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게리 쿠퍼(1943년작). <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죽음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다. 파블로의 집시 아내 필라르는 점술을 통하여 조던의 죽을 운명임을 내비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던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임무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공동선을 이룩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던이 죽음을 앞두고 만난 마리아와 사랑을 탐닉하는 모습은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위한 사육제였을까?
조던이 솔밭에 숨어 반란군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장면을 헤밍웨이는 이렇게 그렸다. "그는 이제 주변과 완전히 하나나가 되어 모든 것을 한눈에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그는 엎드려 있는 땅바닥에 깔린 솔잎을 만져 보았고, 또 뒤에 기대고 있던 소나무 줄기의 껍질을 만져 보았다." 버스의 창밖에 보이는 능선에 걸린 저 흰구름이 바로 조던이 바라보던 구름인 것 같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그린 스페인 내전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반하여, 요나스 요나손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그린 스페인 내전은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알란 칼슨은 스페인에서 온 친구 에스테반을 따라갔다가 끼어든 스페인내전에서 좌파 공화국 군대에 가담하여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었던 알란은 다리 위에 사람이 없을 때를 골라서 폭파하곤 한다.
한번은 폭약을 장착한 다리 위에 갑자기 짜리몽땅한 장군이 나타난다. 알란은 숨어있던 숲에서 튀어나와 "거기서 빨리 나와요! 모두들 콩가루가 되기 전에 빨리나오라고!"하고 소리쳐 그 장군의 목숨을 구해주는데, 그가 바로 프랑코였던 것이다. 헤밍웨이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다.
무언가 남겨 놓은 듯 아쉬움 속에 살라망카를 떠나 마드리드로 향한다. 마드리드로 가는 도로변에서 우거진 협죽도(夾竹桃)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핑크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보기에도 좋다.
중국에서는 대나무에 핀 복사꽃이라는 의미를 담아 협죽도(夾竹桃)라고도 하는데, 우리는 잎이 버들잎 같고 꽃은 복사꽃 같다고 해서 유도화(柳桃花)라고 부른다. 협죽도과에 속하는 넓은 잎 늘푸른떨기나무로 인도가 원산이다. 우리나라에는 1920년에 수입되어 제주도와 남부지방에서는 정원수로 심지만, 중북부지방에서는 관상용화분으로 키우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스페인에서 본 것처럼 가로수로도 심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 하지만, 유도화는 장미보다 더해서 치명적인 독성이 있다. 꽃과 잎, 뿌리, 줄기에 올레안드린(oleandrin)이라고 하는 독성물질이 들어있어 먹을 경우 구토와 복통을 일으키고 심하면 호흡곤란과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할 수도 있다. 독을 잘 다스리면 약으로 사용하는 법이다. 유도화의 잎은 협죽도엽이라고 해서 강심과 이뇨를 위한 생약제로 사용한다.
'중약대사전'에는 "맛은 쓰고 성질은 차며 독이 있다. 강심작용을 하며 이뇨한다. 담을 삭이고 천식을 멎게 하며 진통하고 어혈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다. 심부전, 천식해수, 전간, 타박상으로 인한 부종 및 동통, 폐경을 치료한다"라고 나와 있다.
유도화의 독성은 청산가리의 6천배에 이르는데 외국에서는 유도화 나뭇가지를 꺽어 젓가락으로 사용했다가 사망한 경우도 있고, 유도화 나무를 태운 연기를 마셔도 중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유도화 가지를 태운 연기로 적진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왔다고 하는데, 유도화가 1920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수입되었다면 신라시대에는 없었을 터이니 드라마 고증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위험한 나무가 도로변에서 무성하게 자라도록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가로수로 심는 이유는 야생동물들이 도로로 뛰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자동차 무서운 것은 잘 모르는 동물도 자연이 만들어 낸 유도화가 무서운 것은 아는 모양이다.
로드킬로 인한 교통사고의 위험도 줄이고 야생동물을 보호할 수도 있으니 추위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여 우리나라의 도로변에도 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협죽도에서 생즙을 내거나, 물에 달여서 만든 친환경농약을 이용하거나, 협죽도를 태운 연기로 하우스 내부를 훈증소독하는 등 친환경농업의 소재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마드리드에 가까워지면서 야트막한 산이 나타나더니 산세가 제법 험해진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반군측이 마드리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총공세를 펼친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전쟁은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측의 승리로 끝났다. 스페인 내전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다. 내용은 스페인 영토 안에서 일어난 내전이었지만, 전투는 국제전의 양상을 보였다. 소비에트 연방과 서방의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 여단이 반파시즘 진영인 인민 전선에 가담하였고,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과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프랑코의 반란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도시 노동자, 소작농 같이 자산이 없는 서민층은 물론 고학력 중산층들은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고, 가톨릭 성직자, 지주, 기업가들은 프랑코 반란군을 지지하여 계층이 대립하는 양상에 더하여 가톨릭세가 강한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역 등은 분리독립을 거부한 정부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 2월 총선 결과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한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 전선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한 것이 내전의 사회적 배경이다. 개혁정책으로 지주, 자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년)> <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전쟁은 많은 이야기를 남기는 법이다. 스페인 내전은 헤밍웨이를 비롯한 작가들과 피카소를 비롯한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피카소는 1937년 4월 26일 나치군이 보낸 24대의 비행기가 스페인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는 참상에서 영감을 얻어 '게르니카(Guernica)'를 그렸다. 당시 독일군의 게르니카 폭격으로 250~1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였다고 한다. '게르니카'는 1937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의 스페인 전용관에 설치되어 수많은 관람객들에게 공분을 일으켰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937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미국 몬태나 출신의 로버트 조던이 게릴라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성공하기까지의 3박 4일에 걸친 과정을 담고 있다.
조던은 라그랑하를 거쳐 세고비야를 점령하려는 골츠장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마드리드와 세고비아 사이에 위치한 과다라마 산맥에 위치한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현지에서 도와주기로 한 민병대의 속사정은 복잡해서 폭파작업이 순조롭지만은 않다. 민병대를 지휘하고 있는 파블로는 다리를 폭파한 다음에 반란군의 표적이 되어 공격을 받거나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스페인 내전의 구조를 그려볼 수 있다. 마드리드에 있는 정부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반란군이 집결하고 있고, 반란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민병대가 게릴라활동으로 반란군을 괴롭히는 형세인 것이다. 반란군 입장에서는 앞 뒤에 적을 두고 있는 셈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군이 마드리드를 넘겨주고 만 것은 전략적 판단을 잘 못한데 있었을 것이다. 노엄 촘스키는 공화국 정부가 군사 반란만큼이나 무장한 민병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반란군에 민병대가 희생되는 것을 방관하였던 것이 패인이라고 분석하였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게리 쿠퍼(1943년작). <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죽음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다. 파블로의 집시 아내 필라르는 점술을 통하여 조던의 죽을 운명임을 내비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던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임무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공동선을 이룩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던이 죽음을 앞두고 만난 마리아와 사랑을 탐닉하는 모습은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위한 사육제였을까?
조던이 솔밭에 숨어 반란군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장면을 헤밍웨이는 이렇게 그렸다. "그는 이제 주변과 완전히 하나나가 되어 모든 것을 한눈에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그는 엎드려 있는 땅바닥에 깔린 솔잎을 만져 보았고, 또 뒤에 기대고 있던 소나무 줄기의 껍질을 만져 보았다." 버스의 창밖에 보이는 능선에 걸린 저 흰구름이 바로 조던이 바라보던 구름인 것 같다.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그린 스페인 내전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반하여, 요나스 요나손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그린 스페인 내전은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알란 칼슨은 스페인에서 온 친구 에스테반을 따라갔다가 끼어든 스페인내전에서 좌파 공화국 군대에 가담하여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었던 알란은 다리 위에 사람이 없을 때를 골라서 폭파하곤 한다.
한번은 폭약을 장착한 다리 위에 갑자기 짜리몽땅한 장군이 나타난다. 알란은 숨어있던 숲에서 튀어나와 "거기서 빨리 나와요! 모두들 콩가루가 되기 전에 빨리나오라고!"하고 소리쳐 그 장군의 목숨을 구해주는데, 그가 바로 프랑코였던 것이다. 헤밍웨이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