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업계, 간납사와의 ‘악연’ 이번엔 끊을까

정희석
발행날짜: 2015-07-27 01:14:09
  • 의료기기협회 ‘간납제 철폐’ 주장…정부·국회·언론 등 다각도로 접근

“예전 같은 실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엔 다르다.”

의료기기업계가 의료기관의 의료기기(치료재료) 구매업무를 대행하는 ‘간납사’(간납도매업체·구매대행업체)와의 전쟁을 또 다시 선포했다.

▲과도한 수수료 징수 ▲의료기기 유통질서 교란 ▲리베이트 문제 등 간납사로 인한 폐해와 업계 피해를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것.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회장 황휘)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하반기 주요 사업을 소개하면서 ‘간납제 완전 철폐’를 중점 과제로 삼았다고 밝혔다.

협회는 간납제 완전 철폐를 ‘치료재료 원가조사를 통한 가격인하 정책 폐지’를 위한 대안 중 하나로 제시했다.

이날 협회 홍보위원회는 “대형병원 주도의 간납사가 불합리하고 중복적인 유통구조로 건강보험 재정 및 의료기기 유통질서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치료재료 상한금액은 정해져 있지만 실제 업체가 받을 수 있는 납품 가격은 상한액에 못 미치는 현실”이라며 “더욱이 병원에 제품을 공급하는 간납사들이 과도한 수수료는 물론 일부 유통비용까지도 업체에 떠안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간납제 완전 철폐 주장은 더 이상 간납사들의 ‘그들만의 잔치’를 지켜볼 수 없다는 업계의 강력한 개선의지를 담고 있다.

간납사들이 수행 업무에 비해 과도한 간납수수료 책정과 높은 마진을 취해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유통구조를 만든 간납제 자체를 폐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업계, 3년 전부터 간납사 폐지 주장

간납제 폐지 주장이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의료기기업계와 간납사의 ‘악연’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를 비롯한 의료기기 4개 단체는 회원사를 대상으로 간납사들의 불공정거래 관행 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형 간납사들의 불법 리베이트 조사가 진행되면서 부당거래 및 부적절한 납품 관행을 개선해야한다는 업계 목소리가 높았다.

실제로 협회가 회원사들에게 발송한 의견수렴서는 간납사들이 요구하는 ▲수수료율 ▲수수료 부과체계 투명성 여부 ▲대금 결제기간(현금·어음) ▲납품대금에 대한 보증제도 유무 ▲간납사 역할(가격협상·계약 및 세금계산서 발행·대금결제·의료기관 검수납품·제품보관)을 묻는 문항으로 구성됐다.

이를 통해 의료기기 4개 단체는 간납사들의 불공정행위를 최대한 수집해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강력하게 시정을 촉구하고 제도개선을 요구한다는 방침이었다.

업계는 의견 수렴에만 그치지 않았다.

2013년 초 협회는 간납제 폐지를 담은 제도개선안을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제출했다.

협회는 개선안에서 “간납사들이 의료기기 제조·수입·판매업체로부터 구입한 의료기기를 실제 구입가격보다 높은 금액으로 의료기관에 공급하고, 그 차액 중 일부를 의료기관에 리베이트로 제공하는 비리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일부 간납사들은 담당업무에 비해 과도한 수수료를 징수하고 공급물품에 대한 대금결제 보증회피, 세금계산서 발급 지연 및 납품기회 차단 등 의료기기 유통질서를 교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간납사가 법상 설치 근거가 없고 또 계약·대금결제 등 대부분 단순 행정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치사유가 없다”며 간납제 폐지를 주장했다.

다만 부득이하게 간납사가 존치해야 한다면 ▲과도한 대행수수료 대폭 인하 ▲정율 수수료 도입 ▲납품과 동시에 세금계산서 발행 ▲대금결제기간 단축 ▲대금지급 보증 ▲재벌기업 투자 방지 등 현실적인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업계의 간납사 폐지 목소리는 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이어졌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는 2013년 10월 28일 국무총리실 민관합동규제개선추진단과의 ‘마중 톡’(Talk) 간담회에서 간납사 폐지를 건의했다. 사진 출처: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의료기기산업협회는 2013년 10월 28일 국무총리실 민관합동규제개선추진단과의 ‘의료기기업종 규제개선 간담회’에서 간납사 폐지를 위한 제도개선을 건의했다.

당시 협회가 제출한 제도개선안을 살펴보면, 간납사가 의료기기업체와 의료기관 사이에서 ‘계약에 의한 독점적 기업 간 거래’(B2B)를 수행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공정한 유통거래를 위반하더라도 행정처분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간납사가 의료기관으로부터 의료기기·치료재료 구매업무를 위탁받아 수행하지만 의료기기법상 제조업·수입업·판매업·수리업·임대업 등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아 행정처벌 근거가 없다는 것.

특히 “건보재정과 연계해 의료기기(치료재료) 보험수가는 지속적으로 인하되는데 반해 간납수수료는 매년 인상될 뿐만 아니라 수수료 또한 과도한 수준”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협회는 “간납사를 폐지하거나 의료기기 도매업허가를 신설해 허가받은 사람만이 간납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매업자 준수사항을 법제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규제완화 분위기 편승 가시적 성과 기대…다각도로 접근

업계의 간납사 폐지 요구는 별다른 제도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여전히 표류 중이다.

이는 업계가 회원사 대상 설문조사는 물론 정부에 민원을 내고 공정거래법 등 법상 간납제 문제를 파악하는 등 나름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독점적 권한을 가진 간납사를 상대로 하기엔 다소 미온적이고 안일한 대응이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대목.

이 점은 협회 또한 크게 부정하지 않는다.

협회 관계자는 “과거 간납사 폐지 건의는 비공식적·비공개적으로 복지부·식약처·심평원에 민원을 내는 것으로 이뤄졌다”며 “당시에는 간납제 자체가 근본이 없는 제도라고 판단해 이런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면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협회 전임 집행부 시절 회원사 대상 (간납사 폐해 사례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날짜까지 잡았지만 취소한 적이 있었다”며 “당시 복지부·식약처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고, 조만간 대책이 나올 것으로 예상해 발표를 미뤘지만 끝내 업계가 원하는 바가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협회는 과거를 교훈삼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현 정부 ‘규제완화’ 기조를 등에 업고 다각적인 접근방식으로 간납제 폐지를 현실화하겠다는 것.

협회 홍보위원회 이진휴 부위원장은 “예전 같은 실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이번엔 다르다”며 “협회는 과거처럼 의견 제시에 그치지 않고 간납사 폐지를 ‘의료기기 중점 규제과제’로 삼아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국회·언론 등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실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협회 홍보위원회 이진휴 부위원장은 “간납사 폐지를 ‘의료기기 중점 규제과제’로 삼아 정부·국회·언론 등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실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번 간납사 폐지 주장이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규제완화 중심 친기업적인 정책 기조를 감안할 때 업계가 주장하는 간납사 폐지 목소리가 상당부분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실제로 협회가 현 정부 들어 민관이 참여하는 규제개혁위원회에 제출한 의료기기 분야 개선과제 중 ‘신의료기술평가’를 제외한 요구안들이 대부분 수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아진 의료기기업계 위상 또한 한층 기대감을 높이는 요인.

대표적으로 의료기기분야 ‘손톱 밑 가시’였던 신의료기술평가의 경우 업계의 지속적인 제도개선 건의로 상당부분 진전을 이뤄내고 있다.

이는 의료기기업계가 무조건 순응하던 ‘을’의 입장에서 벗어나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제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 아니라 영향력 또한 커졌다는 반증이다.

법적 근거 부재·업체 간 이견 풀어야 할 숙제

과도한 수수료로 의료기기업계 공분을 사고 있는 간납사는 사실 미국 GPO(Group Purchasing Organization)처럼 제대로만 활용하면 병원과 의료기기(치료재료)업체 모두에게 이익이다.

미국 GPO는 다수 병원으로부터 구매대행을 위탁 받아 공급업체로부터 대량으로 제품을 일괄 구매한다.

제품을 대량 구매하기 때문에 제품 가격 할인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개별 병원은 수량할인을 받아 비용을 절감하고, 이 비용절감액의 일정 부분을 GPO가 마진으로 취하게 된다.

또 공급업체 입장에서도 안정적인 제품 공급과 함께 일괄구매를 통한 유통 및 재고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처럼 병원과 공급업체 모두에게 득이 되는 간납제가 정작 국내에서는 전혀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게 업계 주장이다.

유통단계만 늘어나 전체 유통비용 상승을 초래하고 공급업체에 과도한 수수료를 요구해 간납사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는 이 같은 부작용을 개선하기 위해 간납사 폐지 카드를 또 다시 꺼내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큰 난관은 현재 간납사를 폐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 업계가 정부 부처에 간납제 제도개선을 건의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이유 또한 간납사를 강제할 수 있는 법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의료기기 도매업 신설 방안 역시 오히려 간납사를 양성화할 수 있다는 문제점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

간납사 폐지 주장을 놓고 업체들의 입장이 다른 점도 풀어야 할 숙제다.

일부 업체의 경우 그나마 간납사가 있어 진입장벽이 높은 병원에 제품을 납품할 수 있기 때문에 간납제 폐지를 반대하고 있다.

고가의 구매대행 수수료에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간납사와의 ‘갑-을’ 관계에 있는 의료기기업계가 또 다시 꺼내든 간납제 폐지 주장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고 실행해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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