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9일 의료분쟁조정절차의 강제시행을 골자로 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 국무회의를 거쳐 6월 중 공포될 예정이다. 비록 사망 또는 중상해의 경우 등에만 해당된다고는 하나, 이에 따른 여러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되어 의료계가 반대했으나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진료 현장의 의사들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2년 전 해당 법안 발의 후 그동안의 심의와 통과 과정에서 의료계를 대표하는 의협이나 병협 등이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는지는 차치하고, 과연 이 법안의 통과 후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게 될 일들에 대해서 국회는 물론이고 정부나 국민들이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의사도 신이 아니라 사람인 이상, 의사가 수행하는 의료행위의 과정에서 환자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적잖게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의료 자체가 이미 많은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의로 시행한 치료의 과정에서 불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아무리 의사가 최선을 다 했다고 해도 그 결과를 기준으로 책임을 지운다면 과연 어떤 의사가 앞으로 소신껏 일할 수 있겠는가.
이번 개정안 통과로 환자나 보호자의 의료분쟁조정 신청 건수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전과 달리 강제성을 부여함으로써 의료기관과 의사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필자 또한 십여 년 전 의료분쟁 및 소송을 실제로 겪은 바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하루하루가 정말 피 말리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마찬가지로 의료분쟁에 휘말리면 그 경중을 떠나서 의사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게 되며, 누구나 의업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에 빠지게 되고 다른 환자도 제대로 진료를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많은 의사들은 향후 위험 부담이 큰 환자의 치료를 꺼리는 방어진료가 보편화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의료 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하여야 할 수도 있는데, 내 자신이 보호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남을 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중증 환자를 일차 의료기관에서 진료하지 않고 상급병원으로 보내는, 이른바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는 자연히 의료비 증가로 이어지고, 정부가 추구하는 의료전달체계 확립과도 배치되는 일이다.
나아가 지금도 심각한 3D 진료과의 전공의 지원 기피 현상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새로 배출되는 젊은 의사들이 힘들고 어렵고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진료과를 기피하고, 미용성형 등 비교적 덜 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는데, 이번 의료분쟁조정의 강제 개시가 그 화룡점정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다. 비단 전공의뿐만 아니라, 이미 해당과의 전문의들도 기존의 전공을 버리고 의료분쟁의 소지가 적은 진료를 보게 될 거라는 것이다.
그러면 막상 내가 진료한 환자가 사망 또는 중상해 등으로 의료분쟁조정의 강제개시 요건이 성립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법안이 심의 통과되는 과정에서 다수 의사와 법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의료분쟁의 조정 절차 상 독소조항들이 많아서 오히려 소송을 더 선호하는 현상이 벌어질 개연성이 있다. 예컨대, 의료분쟁조정이 강제개시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리 ‘채무부존재 확인의 소’ 등을 제기하여 차라리 소송으로 가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즉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조사를 당하는 것보다는, 내가 주도적으로 자료를 준비하여 항변하고 대응하는 민사소송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될 경우, 의료분쟁에 따른 갈등이나 시간, 금전 등 사회적인 비용을 줄여보자고 도입한 ‘의료분쟁조정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환자나 보호자 역시 굳이 소송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화를 통해 타협에 이를 수도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의사들 입장에서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조정절차와, 강제로 당하는 조정절차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결국 이번 강제조정 개정안은 소송을 줄여보자고 시작된 의료분쟁조정제도를 무력화시키고 도리어 소송을 부추기는 제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 마디로 ‘변호사들만 좋은 제도’라는 푸념이 들려온다.
그 밖에도 여러 SNS 등을 통해서 ‘의료분쟁조정 강제개시 시대’를 살아가는 의사들의 생존법에 대해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의사들의 뜻을 무시한 채 국회가 만들고 정부가 방조한 제도 개악에 대하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의사도 한 가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인 이상,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의사로서의 직업의식만 우선시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지난 수십 년 간 의사들은 여러 가지 규제와 악법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만들었고, 그 결과 지금 우리 의료제도는 저비용 저효율의 싸구려제도로 전락했다. 이번에도 우리는 해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다만 그 해답이 과연 의료와 국민들에게 좋은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