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를 만나다

김현정
발행날짜: 2005-07-04 07:11:47
‘… 세계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한층 더 인간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깊은 인도(人道)야말로 참다운 문화다. 세계의 모든 불행은 우리가 아직 참다운 문화에 도달하지 못한 채 문화는 지식이나 능력이 이룩한 것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외적인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보다 나은,가치 있는,보다 호의에 가득찬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 이런 슈바이처 같은 사상을 받아들여 의사로서 보다 '인간적인, 가치있는 , 보다 호의에 가득찬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의료계의 슈바이처 후예들을 만나봤다. 극구 슈바이처라는, 그들의 말을 빌면 "과장된 껍데기"를 거부하는 모습이지만 말이다.
단국의대 본과 4학년 김용준씨
"장애우들과의 시간을 즐겼을 뿐인데..."

촛불상과 청년슈바이처상 등을 타면서 각 언론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김용준씨(단국의대 본과4학년, 27세)의 '봉사'에 대한 첫 마디다.

김 씨가 이렇게 봉사의 인생을 살게 된 시작은 고등학교때다. 당시 기독교 동아리 미문장애선교회에서 활동을 하게 된 그는 다양한 장애인들과 아름다운 만남의 즐거운 시작을 했다.

"같이 즐기고, 놀고, 함께 쇼핑하면서 즐거워했을 뿐이에요.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당시를 회고하는 김 씨의 일성이다.

의사라는 꿈을 갖게 된 것은 이보다 어린 중학교 때부터다. 김 씨는 의사라는 직업이 자기자신이 큰 도구가 없어도 남한테 봉사할 수 있고 베풀 수 있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김 씨는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지구촌의료봉사단에 참여해 대전에 있는 믿음의 집에 매달 4째주에 정기 방문했다. 믿음의 집은 20여명의 할머니와 2~3명의 중증장애인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온정과 사랑을 쏟고 싶은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었다.

김 씨는 그 때부터 지체장애아와 뇌성마비 등 장애아동 30여명이 있는 성서의재활원에 매달 두번씩 찾아가게 됐다. 또 얼마전에는 쓰나미로 인해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던 남아시아 일대 봉사활동에도 다녀왔다.

그 곳에서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 답게 현지 아이들을 모아 아리랑을 가르치고 함께 노래 부르면서 선배 의사들 못지 않게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여러 상을 타게 되면서 받은 상금도 아픈 아이들을 위해 선뜻 기부하고 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세계를 이끌어 나갈 새싹이니까요" 김 씨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온전한 애정의 이유였다.

삼성서울 재활의학과 이강우 교수
"후학들에게도 봉사하는 의사상을 몸소..."

얼마전 한 의대교수가 10년 동안 1만명의 노숙자를 위한 사랑의 인술을 남모르게 펼쳐온 것으로 뒤늦게 확인돼 감동을 전해줬다. 온정의 주인공은 삼성서울병원 재활의학과 이강우 교수.

이 교수는 지난 1996년 12월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노숙자 및 무의탁 노인 쉼터인 '평화의 집'과 '안나의 집'을 방문해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펼쳐왔다.

10년간 매월 두차례씩 무료진료를 해온 것이 어느덧 200회를 넘어섰으며 이 교수가 돌본 노숙자와 무의탁 노인도 줄잡아 1만여 명에 달하고 있다.

이 교수가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 출신의 빈첸시오 (한국명 김하종) 신부가 이 교수에게 치료를 받을 때 그가 무의탁노인과 노숙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부터다.

이 교수는 의료봉사를 위해 전공의와 약사, 간호사 등 5~6명의 의료진을 구성해 매번 50~70여 명의 환자에게 진료를 시행해왔다. 중증도의 환자가 발생하면 삼성서울병원이나 보건소, 시립병원으로 연계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이 교수는 여기서 그 행보를 그친게 아니다. 자신이 가진 재주를 사회에 조금씩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가르침을 후학들에게 전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그래서 그는 봉사활동을 해오면서 항상 전공의들과 동행했으며 정식 수련 과정에도 이를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 몸에 밴 봉사 정신을 수련이 끝나고 전문의를 딴 이후에도 실천하는 후학들도 눈에 띨 정도다.

"점차 핵가족화 되고 개인주의적으로 되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의사라는 자신의 재주를 남에게 조금씩이라도 환원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항상 시키고 있습니다" 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후학들이 이 같은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교수가 몸소 실천하는 봉사의 모습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무료 의료봉사를 하는 서명희 개원의
“왼손에는 탈북자, 오른손에 외국인노동자”

평일에는 탈북자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지원하고 휴일에는 외국인노동자를 위해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서명희 원장.

서명희 원장은 지난 2000년부터 매월 첫째·셋째주 일요일에 외국인노동자 시설인 ‘선한이웃클리닉’을 방문해 무료 의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우리보다 까맣다고 무시 받고 천대 받은 사람들이 외국인노동자”라며 “그들을 위해 작은 힘이라마 보탬이 되고 싶어 종교를 통해 봉사활동 하게 됐다”고 말하는 서 원장.

그는 다니는 교회를 통해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주일간의 철저한 교육 활동을 마친 후에야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 선한이웃클리닉 봉사단은 현재 일반과를 비롯 치과, 한방, 안과, 피부과 등의 진료를 같이 하고 있다.

그는 “외국인노동자는 의료혜택을 받기 어렵다”며 “언어도 문제지만 국가 지원정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외국인노동자들은 경제적 사정에 의해 병원에 못가는 이들도 있지만 불법체류의 경우 신원상의 위험 때문에 병원을 찾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외국인노동자와 진료 상담 중인 서 원장
그는 “러시아 환자인데 여러번 간질 발작을 일으켜 도와주려 했지만 3년의 체류기간의 끝나 신원상의 위험으로 도망갔다”며 “이런 이유들 때문에 외국인노동자 환자들이 신경성 질환을 앓고 있다”고 전했다.

한달에 두 번 있는 무료 의료봉사활동이지만 1일 외래진료수가 200여명에 달한다.

“처음에는 언어 문제로 봉사자들이 고민해왔지만 외국인노동자들이 모국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을 데리고 오면서 환자가 배로 늘었다”고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따뜻한 손길은 주중에도 계속됐다.
인터뷰를 응하는 시간,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탈북자 청소년들.

문화적 차이로 인해 우리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서 원장이 내민 손길은 따뜻한 마음이었다.

“탈북자 청소년들을 위해 예방접종, 무료 진료, 그리고 개인 상담들을 해주고 있다”는 서 원장.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할 때는 예산도 부족하고 지원의약품도 많이 없었지만 현재 교인들과 여러 단체들의 후원으로 의료봉사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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