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위 성격의 조직은 더 이상 없어야

양염승
발행날짜: 2007-10-16 09:11:30
  • 양염승(전 대한의사협회 의료법비대위 중앙위원)

국보위에 대한 기억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의 신군부가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이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5월 31일 대통령 최규하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를 출범시켰다. 국보위는 상임위원회가 실질적인 실세 기구였으며, 전두환은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권력을 인수했다.

위키백과에 나오는 국보위에 관한 설명이다.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했던 필자의 뇌리에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은 쿠데타(coup d'état)와 동의어로 이후 깊숙이 각인되었다.

의권쟁취투쟁위원회

2000년 의사들이 거리로 나섰다. 1999년 말부터 의약분업 정부안의 철회를 요구하며 수 차례 대규모 장외집회를 개최한 것이다. 대정부 투쟁에 따른 전권을 위임받은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가 결성되고, 유성희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이 물러나는 등 의협이 유명무실해진 반면 의쟁투가 대외투쟁을 주도했다. 일종의 쿠데타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의료법비상대책위원회

의료법 개정 실무 작업반(의협을 비롯한 각 직능단체 및 시민단체 추천자, 외부전문가, 보건복지부 관련 팀장으로 구성)을 통하여 의료법 전부개정안을 마련하는 협상과정에서 보건복지부의 이중적 행태와 밀실협상의 음모가 의사협회 일부 회원들에게 인지되고, 의협의 무능과 무기력한 대응방식에 대해 의협 집행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고조되자 장동익 의협회장은 2007년 2월 투쟁의 전권을 위임받은 의료법 비상대책위원회(의료법비대위)를 만들기로 하고, 대의원총회를 통하여 추인을 받는 형식을 취하면서 스스로 의료법비대위 위원장직을 맡았다.

당시 장동익 의협회장의 회무능력과 부도덕성으로 인하여 회장 불신임안을 상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봉쇄하고, 의료법 개악 저지과정에서의 잘못을 면피하려는 속셈을 가진 의료법비대위의 설치는 일종의 친위 쿠데타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렇듯 비대위라는 이름이나 성격의 조직이 나타날 때는, 의협이 처한 상황이 지극히 불안하고, 의료계가 어떻게 돌아갈 지 예측하기 힘든 비상시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의협의 지도력의 위기가 극대화된 시점이기도 하다.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으로 만들다

의협을 이끌어 갈 지도력을 상실한 장동익 회장 아래서 의료법비대위는 실무위원장(정책, 홍보, 실행위원장) 중심으로 치과의사협회, 한의사협회등과 연합하여 범의료의료법비대위(범대위)를 결성하여 상호 공조체제를 강화하고, 정책을 개발·입안·홍보·실행하면서 현안을 능숙하게 잘 처리해 나갔다.

장동익 의협회장의 사퇴로 인하여 의협회장직무대행체제가 들어섰을 때, 비대위위원장 선임문제로 일시 난제가 발생하였으나 다행히 변영우위원장이 위원장직을 수락함으로써 의료법비대위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무난히 의료법 개악저지 투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회원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었고 향후 의료현안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도 하면된다는 신념을 불어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전국책(戰國策)》에 이르기를,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福)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功)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고 했는데 아마도 의료법비대위의 활동이 그렇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법 전면개정은 의료의 탈전문화(脫專門化)와 평등주의(또는 균등주의), 관료주의에 의한 국가 통제강화가 그 기저에 깔려 있는데, 현행 의료체계 전반을 개혁의 대상이라 여기고, 법만 만들면 못할게 없다는 ‘법률만능주의’와 의사를 불신의 대상으로 보고 시시콜콜 법령에서 규제해야 한다는 사고가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향후에도 정부의 의료법 개정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비록 의료법비대위는 지난 10월 6일 대의원 총회를 통하여 해체됐지만, 앞으로도 의료법, 의료사고피해구제법 등의 의료관계법령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검토하고, 국회의 동향을 상시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의료법 투쟁과정에서 타 의료단체(치과의사협회, 한의사협회 등)와 공조를 유지했던 전례는 앞으로의 유사한 투쟁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비대위라는 성격의 조직은 더 이상 없어야

의협 집행부가 회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의료현안에 적극 대처하고 회무를 잘 수행한다면, 투쟁의 전권을 위임받은 비대위라는 이름이나 성격의 조직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협의 최고 의결기구는 대의원총회이고, 최고 의사집행기구는 상임이사회라고 볼 수 있다. 의협 회장을 중심으로 상임이사회가 책임감을 갖고서 현안을 돌파하면 된다. 비상시국에나 있을 법한, 쿠데타(그것이 친위쿠데타든 아니든)가 일어난 듯이, 의협 정관의 규정과 구성요소를 무시하며 전권을 부여받는 또다른 형태의 비대위(그것의 명칭이야 어떠하든)가 더 이상 출현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물론, 의사들이 거리에 나가 투쟁할 필요 없이 묵묵히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의료환경이 조성되기를 함께 꿈꾸어 보면서 말이다.

▶이 칼럼은 메디칼타임즈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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