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의 눈물…분만을 포기한 전문의

안창욱
발행날짜: 2009-09-03 06:47:21
  • 의사 30명, 의료현장 애환 담은 수필집 발간 화제

의사 30명이 진료현장에서 겪은 애환을 담은 수필집을 펴 냈다.

한국의사수필가협회(회장 맹광호)는 최근 협회 창립 1주년을 맞아 회원 30명의 글 60편을 모은 ‘너 의사 맞아?’ 제하의 첫 작품집을 발간했다.

맹광호 회장은 “진료실 안팎에서 경험하는 의사들의 삶과 애환을 책으로 펴내 의대생이나 의사들에게는 하나의 인문서로, 일반인들에게는 의사와 의료계를 좀 더 가깝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작품집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한양대의료원을 정년퇴임한 이방헌(심장내과) 전교수는 스텐트 시술후 환자가 사망하면서 겪은 고통을 ‘명의의 실수’ 편에서 소개했다.

심장혈관을 확장시킨 50대 환자가 사망하는 뜻밖의 사건이 터지자 가족들이 의사의 과실로 몰아갔다.

그는 사망한 환자의 남편이 의사의 과실이 아니냐며 책상을 발로 차며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자 간호사도 없이 유가족들과 혼자 맞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고 적었다.

그는 “수술한 환자가 죽자 보호자가 집도한 의사를 복도에서 칼로 찌른 며칠 전의 신문기사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유가족은 “그래요. 죽을 수도 있지요, 물론. 하지만 의사의 실수도 있잖아요? 선생님”이라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집요하게 따졌다고 한다.

그는 “하나뿐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밤을 살라먹고 환자가 죽으면 허탈하고 슬픈 것은 의사도 마찬가지다. 정말 나도 억울하여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어금니를 앙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고 소개했다.

환자의 시아버지는 “선생님은 명의 아닙니까, 명의. 명의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을 살려야죠. 죽을 사람도 살리는 게 명의 아닙니까? 그 명의가 치료한 환자가 죽었으니 이게 바로 선생님의 실수다 이겁니다”라고 눈을 흘기고는 진료실을 나갔다고 한다.

그는 일행들이 돌아간 후 가운을 벗어던지고 진료실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허전한 가슴속으로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이 철렁 떨어졌다고 썼다.

유소아청소년과 유인철 원장은 ‘너 의사 맞아?’ 편에서 25년여 전 레지던트 1년차 때 4살이던 다운증후군 환자의 주치의를 맡았을 때 사연을 실었다.

유인철 원장은 책에서 “환자의 생명보다 주말에 나갈 수 있나 없나 하는 문제가 내겐 더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그렇게 생명을 하찮게 여길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이미 살인죄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죄책감을 표현했다.

결국 아이는 사망했고,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나서면서 그의 죄책감은 더 커졌다.

그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 어린이 중환자실을 살피고 돌아서는데 문 안쪽에서 생명줄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어린 영혼들이 ‘너 의사 맞아? 너 의사 맞아?’하고 소리치는 것 같아 도망치듯 당직실로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답지 않은 껍질’을 벗겨 내기 위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고 반성의 글을 남겼다.

권준우 신경과 전문의는 ‘깊은 한숨’ 편에서 임종을 맞은 할아버지와 그 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적극적인 치료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고, 아버지 문병조차 자주 오지 않았던 아들이 임종을 지키기 위해 병실로 들어서자 할아버지가 사망했다.

권 전문의가 사망 선언을 하기 위해 시계를 꺼내 들자 아들이 황급히 팔을 붙잡더니 하루 정도 사망 선언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상조에 가입을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모르고 아직 가입을 못했다는 것이다.

권 전문의는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나지만 그 긴 생명에 대한 존경과 배려는 늘어나는 수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동방예의지국, 효의 나라라는 옛말이 무색할 지경이다”고 개탄했다.

은혜산부인과 김애양 원장은 분만을 포기한 사연을 담았다.

김 원장은 ‘펭귄 의사’ 편에서 12년 전 산부인과를 개원한 후 5년 남짓 얼추 500명의 분만을 시행했지만 제대탈출로 인한 형사소송에 휘말렸고, 또다른 산모가 출산 직후 사산되자 병원 문을 닫아 버렸다.

김 원장은 “불가항력이라 해도 혹시 내가 아니었다면 아기가 죽지 않았을 거란 자괴감과 소규모로 안일하게 응급 사항에 대처할 수 없는 병원을 꾸려 나가는 것에 대한 책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김 원장은 “몇 년 후 새로 개원한 산부인과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분만 환자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점차 분만은 대형화된 병원에서 여러 명의 의사가 동업할 때여야만 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밝혔다.

“펭귄은 구태여 날지 않아도 지천에 깔린 먹이를 구할 수 있다. 산부인과 의사들도 부인과만으로 의사의 위상을 잃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면서 “분만을 받지 않는 산부인과 의사도 행복하다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김 원장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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