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Ⅱ'[22]
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3)
경사진 통로를 따라 7층 높이에 해당된다는 2층에 올랐다. 황후가 2층에 있는 예배장소로 갈 때 가마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만든 구조라고 한다. 2층 테라스의 한 가운데에 녹색의 돌로 동그랗게 표시된 장소가 황후의 옥좌가 놓였던 곳이다.
이곳은 지성소를 포함한 아래층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이다. 지성소 가까이 왼쪽에 있는 정자는 황제가 예배를 드리던 장소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아야 소피아의 1층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2층의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한 올 한 올 헤아릴 수 있어서일까?
[사진; 데이시스 모자이크(좌), 단돌로의 관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대리석판(Wikipedia. Hagia Sophia에서 인용함(1)(좌-20150911_152350)]
황후가 예배를 드리던 자리를 지나면 대리석문을 통해 남쪽 회랑, 그러니까 지성소 쪽을 향해 오른편을 따라 이어지는 회랑으로 가게 된다. 천국과 지옥의 문이라고 하는 문이다. 2층에서는 몇 백 년을 회칠 속에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넨 성화들을 볼 수 있다.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를 먼저 볼 수 있다. '데이시스'란 간청 혹은 애원을 의미한다. 심판을 주관하는 그리스도에게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1261년에 제작되었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에 있는 성화들 가운데 가장 심하게 훼손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나마 양호한 편으로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지만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았다.
데이시스 모자이크를 감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림을 빛나게 하는 자연광 효과이다. 남쪽 창에 가까이 걸려있는 이 그림은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풍성하게 받고 있다. 모자이크에 등장하고 있는 세 사람의 배경에는 조개모양의 황금빛 문양을 넣었다. 햇빛이 조개껍질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강하게 산란되는데, 특히 예수상의 후광 부분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데이시스 모자이크의 맞은 편 바닥에는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대리석 판이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쳐들어온 베네치아의 단돌로의 무덤이 있던 자리이다. 그는 평소 십자군들이 그동안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으려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쳐들어왔을 때의 나이는 무려 95세였다. 단돌로의 빗나간 조국사랑은 기울어가던 비잔틴제국에 치명상을 입힌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이 물러난 다음 콘스탄티누폴리스 사람들은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내다버린 것도 모자라 무덤이 있던 자리에 이름을 새겨 밟고 다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되고 말았다. 그 골이 얼마나 깊었던 지 사건이 발생한지 800년 가까이 된 2001년에 아테네를 방문한 교황은 그리스 정교회 흐리스토둘로스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저는 오랫동안 동방 그리스도 신앙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불행스러운 약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지 회복을 위해 떠난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기습한 사건은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라틴교회에 속한 그리스도교들이었기에 가톨릭교회로서는 더더욱 유감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2)"
진정성이 절로 느껴지는,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이 될 만하다. 이제는 혼네를 담은 사과는 커녕 다테마에 마저도 뒤집어버리려 하는 인간들이 꼭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지성소 쪽의 벽에 두 점의 성화가 걸려있다. 안쪽으로 걸려 있는 성화가 '콤니노스' 모자이크이다.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생몰년 : 1087.9.13~1143.4.8, 재위기간 : 1118.8.15~1143.4.8)와 이리니 황후(1088~1134.8.13)가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1122년에 제작되었다.
황제가 들고 있는 자루에는 돈이 들어 있고 황후가 들고 있는 것은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황태자인 장남 알렉시오스 콤니노스(1106.2~1142)의 모습은 성화의 옆으로 튀어나온 기둥의 옆면을 활용하여 그려졌다. 이들도 불행한 가족이다. 황후가 46세를 일기로 죽은 8년 뒤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황제 역시 다음해 사냥에서 입은 가벼운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옆으로 조에 여제의 모자이크가 걸려 있다. 11세기에 제작된 이 모자이크는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그리스도가 조에여제(생몰년 : 978경~1050.6)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생몰년 : 1000경~1055.1.11, 재위기간 : 1042.6.11~1055.1.11)를 축복하는 모습을 담았다.
다른 성화와는 달리 조에여제의 모자이크라고 하는 이유는 세 차례나 결혼을 했던 조이 여제는 남편이 바뀔 때마다 모자이크에 그려진 남편의 얼굴과 문구도 바꾸었다고 해서이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황제 역시 교회에 헌납하는 돈자루를 들고 있고 조에여제는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를 들고 있다.
비계 때문에 무심코 지날 수 있었던 2층 왼쪽 회랑의 박공벽에 있는 성화를 본 것은 우연이었다. 몇 사람의 성인을 그려놓았다는데,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성 요안니스 흐리소스토모스(왼쪽)와 성 이냐시오(오른쪽)를 카메라에 담았다. 두 성인들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고 있다.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전환하면서 이 성화를 회칠로 덮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2층 천장의 어두운 구석에 있다는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 모자이크는 보지 못했다. 이 모자이크에서는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생몰년 : 866.9.19~913.6.6, 재위기간 : 912.5.11~913.6.6)를 형상화했다.
2층을 모두 돌아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왼편 회랑에 서 있는 소원기둥 앞에 줄을 섰다. 12세기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따라 땀흘리는 기둥 혹은 통곡의 기둥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둥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면 축축한 느낌이 드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이라고 하는데, 가이드 말로는 이 기둥이 예레바탄 사라이에 닿고 있어서라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하여 손가락을 360도 돌리기에 몰입하느라 정작 소원 비는 것을 깜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 성당을 완공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만성적인 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당 남쪽 회랑 밖 정원을 138미터 길이에 36미터의 너비로 파 들어갔는데, 8미터 정도 파 들어가자 단단한 암반이 나왔다. 그 위에 336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씌워 저수조를 만들었다.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조의 모양이 바실리카와 흡사한 모습이어서 바실리카 저수조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스만제국 시절부터는 수많은 기둥이 물에 잠겨 있는 모습이 마치 물에 잠긴 궁전과 같다고 해서 터키말로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i), '물에 잠긴 궁전'이라고 부른다. 저수조의 가장 깊은 곳에는 메두사의 얼굴을 새긴 두 개의 돌이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누여 기둥을 받치고 있다. 일정에 없는 곳은 방문하지 않는 여행사의 일반적인 관행 때문에 우리는 이곳을 가지 못했다.
참고자료
(1) Wikipedia. Hagia Sophia. https://en.wikipedia.org/wiki/Hagia_Sophia
(2)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1, 36쪽, 책문, 2010년
경사진 통로를 따라 7층 높이에 해당된다는 2층에 올랐다. 황후가 2층에 있는 예배장소로 갈 때 가마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만든 구조라고 한다. 2층 테라스의 한 가운데에 녹색의 돌로 동그랗게 표시된 장소가 황후의 옥좌가 놓였던 곳이다.
이곳은 지성소를 포함한 아래층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이다. 지성소 가까이 왼쪽에 있는 정자는 황제가 예배를 드리던 장소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아야 소피아의 1층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2층의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한 올 한 올 헤아릴 수 있어서일까?
[사진; 데이시스 모자이크(좌), 단돌로의 관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대리석판(Wikipedia. Hagia Sophia에서 인용함(1)(좌-20150911_152350)]
황후가 예배를 드리던 자리를 지나면 대리석문을 통해 남쪽 회랑, 그러니까 지성소 쪽을 향해 오른편을 따라 이어지는 회랑으로 가게 된다. 천국과 지옥의 문이라고 하는 문이다. 2층에서는 몇 백 년을 회칠 속에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넨 성화들을 볼 수 있다.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를 먼저 볼 수 있다. '데이시스'란 간청 혹은 애원을 의미한다. 심판을 주관하는 그리스도에게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1261년에 제작되었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에 있는 성화들 가운데 가장 심하게 훼손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나마 양호한 편으로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지만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았다.
데이시스 모자이크를 감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림을 빛나게 하는 자연광 효과이다. 남쪽 창에 가까이 걸려있는 이 그림은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풍성하게 받고 있다. 모자이크에 등장하고 있는 세 사람의 배경에는 조개모양의 황금빛 문양을 넣었다. 햇빛이 조개껍질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강하게 산란되는데, 특히 예수상의 후광 부분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데이시스 모자이크의 맞은 편 바닥에는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대리석 판이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쳐들어온 베네치아의 단돌로의 무덤이 있던 자리이다. 그는 평소 십자군들이 그동안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으려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쳐들어왔을 때의 나이는 무려 95세였다. 단돌로의 빗나간 조국사랑은 기울어가던 비잔틴제국에 치명상을 입힌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이 물러난 다음 콘스탄티누폴리스 사람들은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내다버린 것도 모자라 무덤이 있던 자리에 이름을 새겨 밟고 다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되고 말았다. 그 골이 얼마나 깊었던 지 사건이 발생한지 800년 가까이 된 2001년에 아테네를 방문한 교황은 그리스 정교회 흐리스토둘로스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저는 오랫동안 동방 그리스도 신앙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불행스러운 약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지 회복을 위해 떠난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기습한 사건은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라틴교회에 속한 그리스도교들이었기에 가톨릭교회로서는 더더욱 유감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2)"
진정성이 절로 느껴지는,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이 될 만하다. 이제는 혼네를 담은 사과는 커녕 다테마에 마저도 뒤집어버리려 하는 인간들이 꼭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지성소 쪽의 벽에 두 점의 성화가 걸려있다. 안쪽으로 걸려 있는 성화가 '콤니노스' 모자이크이다.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생몰년 : 1087.9.13~1143.4.8, 재위기간 : 1118.8.15~1143.4.8)와 이리니 황후(1088~1134.8.13)가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1122년에 제작되었다.
황제가 들고 있는 자루에는 돈이 들어 있고 황후가 들고 있는 것은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황태자인 장남 알렉시오스 콤니노스(1106.2~1142)의 모습은 성화의 옆으로 튀어나온 기둥의 옆면을 활용하여 그려졌다. 이들도 불행한 가족이다. 황후가 46세를 일기로 죽은 8년 뒤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황제 역시 다음해 사냥에서 입은 가벼운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옆으로 조에 여제의 모자이크가 걸려 있다. 11세기에 제작된 이 모자이크는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그리스도가 조에여제(생몰년 : 978경~1050.6)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생몰년 : 1000경~1055.1.11, 재위기간 : 1042.6.11~1055.1.11)를 축복하는 모습을 담았다.
다른 성화와는 달리 조에여제의 모자이크라고 하는 이유는 세 차례나 결혼을 했던 조이 여제는 남편이 바뀔 때마다 모자이크에 그려진 남편의 얼굴과 문구도 바꾸었다고 해서이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황제 역시 교회에 헌납하는 돈자루를 들고 있고 조에여제는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를 들고 있다.
비계 때문에 무심코 지날 수 있었던 2층 왼쪽 회랑의 박공벽에 있는 성화를 본 것은 우연이었다. 몇 사람의 성인을 그려놓았다는데,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성 요안니스 흐리소스토모스(왼쪽)와 성 이냐시오(오른쪽)를 카메라에 담았다. 두 성인들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고 있다.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전환하면서 이 성화를 회칠로 덮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2층 천장의 어두운 구석에 있다는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 모자이크는 보지 못했다. 이 모자이크에서는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생몰년 : 866.9.19~913.6.6, 재위기간 : 912.5.11~913.6.6)를 형상화했다.
2층을 모두 돌아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왼편 회랑에 서 있는 소원기둥 앞에 줄을 섰다. 12세기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따라 땀흘리는 기둥 혹은 통곡의 기둥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둥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면 축축한 느낌이 드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이라고 하는데, 가이드 말로는 이 기둥이 예레바탄 사라이에 닿고 있어서라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하여 손가락을 360도 돌리기에 몰입하느라 정작 소원 비는 것을 깜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 성당을 완공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만성적인 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당 남쪽 회랑 밖 정원을 138미터 길이에 36미터의 너비로 파 들어갔는데, 8미터 정도 파 들어가자 단단한 암반이 나왔다. 그 위에 336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씌워 저수조를 만들었다.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조의 모양이 바실리카와 흡사한 모습이어서 바실리카 저수조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스만제국 시절부터는 수많은 기둥이 물에 잠겨 있는 모습이 마치 물에 잠긴 궁전과 같다고 해서 터키말로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i), '물에 잠긴 궁전'이라고 부른다. 저수조의 가장 깊은 곳에는 메두사의 얼굴을 새긴 두 개의 돌이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누여 기둥을 받치고 있다. 일정에 없는 곳은 방문하지 않는 여행사의 일반적인 관행 때문에 우리는 이곳을 가지 못했다.
참고자료
(1) Wikipedia. Hagia Sophia. https://en.wikipedia.org/wiki/Hagia_Sophia
(2)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1, 36쪽, 책문,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