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형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리더십'
고주형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리더십'
12. [마음씀씀이] Give, wait, and forget
마음씀씀이는 욕구다. 욕구는 본질이다. 2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해마다 기억나는 사람의 이름을 한 명씩 쓴다. 망설임 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간다. 몇 년 전부터 반복되어온 습관이다. 스무 명의 이름을 본다. 매번 기억하는 이름은 바뀐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이름 석 자가 보인다. 연락이 두절된 사람도 있고 애증이 섞인 법인이 빈칸을 메우기도 한다.
필자는 이를 '욕구에 들어서는 문’이라 부른다. 첫 번째 문은 '줌(give)의 문’이다. 받기 전에 먼저 주었는지 생각한다. 각성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쉼(wait)의 문’이다. 주고 나서 얼마의 쉼이 있었는지 돌아본다. 준 것을 돌려받지 않는 시간이다.
세 번째 '잊음(forget)의 문’에 들어서면 득실(得失)의 관계를 넘어서고 마음씀씀이의 소명을 확인한다. Give, wait, and forget(줌, 쉼, 그리고 잊음)은 불혹(不惑)의 세대가 되어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바꿔보려는 나의 몸부림이다.
필자 직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변화관리는 남을 향해 있다. 경영학에서 인문학과 닿아 있는 변화관리의 영역은 인간의 속성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종교인이나 심리학자의 몫임을 안다.
경영자가 특정 사안에 대해 의사결정을 달리할 수 있도록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을 변화관리라고 한다면, 학문으로서 경영학의 영역은 논리만으로 욕구를 제어하는 제한적인 영역일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스무 명의 리스트에 내 이름이 들어왔다. 나를 위한 변화관리의 시작이다. 이제 '욕구에 들어서는 문’은 나를 향한다.
줌, 쉼(give, wait)
얻으려고만 하는 A의 사례이다. 작은 직위라도 차지하려고 네트워크를 만들고 감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A는 내세울 것이 많지 않지만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욕구에 이리저리 쏠려 다닌다. 그러나 그에게 뒤늦게 찾아오는 것은 후회였다고 말한다. 주는 과정이 생략된 채 얻으려고만 하는 마음은 한 자리 차지한들 이력 한 줄의 가치도 남기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삶의 기준이다. 내가 줄 것이 없으면 사람은 모이지 않고 어디를 가도 나는 주변인이다. 마음속에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사람은 모인다.
한의학에서는 '불통즉통(不通則痛), 불영즉통(不營則痛)’이라고 하여 기혈순환이 원활하지 않을 때 통증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커뮤니케이션을 동등한 관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통하는 것이고, 이것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부산물이다.
이해득실을 따지려는 욕구는 피하기 힘들다. 좋아서 무언가 제공했다가도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아쉬워한다. 애증의 욕구에 사로잡히면 내게 돌아오는 게 무엇일지,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아닌지 트레이드오프에만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서 내가 쉼(wait)의 과정에서 경계하는 것은 내 집, 내 가족을 보호하려고 '돌도끼’를 만들려는 욕구이다. 주변을 불신하며 이끈 활동은 비능률로 이어진다. 받지 못해도 좋고, 내 믿음에 의해 내가 즐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진행하면 오히려 결과가 좋은 것은 많은 이들이 겪는 경험의 법칙이다.
경영자문을 하면서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종류의 욕구를 만난다. 원장이 보직자를, 센터장이 과장을 불신하는 것을 목격한다. 반면 반대의 액션을 취해야 할 순간이 와도 신뢰를 지키는 쪽의 입장은 '그간 그토록 나를 철저히 믿어줬는데, 이제 와서 배신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신뢰에는 신뢰로 보답하는 것은 주고받음의 과정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참으로 줄 때 그에게로 되돌려지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Give and take를 생각하기보다는 give하고 wait하라. 내가 주고 기다리면 상대도 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주고 또 주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된다. 관계의 여유가 생긴다. 예비 의료인이라면 그동안 많이 받았으리라. 나눔의 정신이라 불러도 좋다. 나 또한 원고를 붙들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give, 나아가 나눔의 시간으로 생각한다. Give and wait했는데 계속 wait해야 한다면 받아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지 않은가.
그리고 잊음(forget)
배우자처럼 무한정 퍼주고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평생 함께할 사람인데 좀 더 퍼주면 어떠리. 또한 퍼줄 게 없어도 기다려주는 게 금실 좋은 부부 아닌가. 인생은 시그모이드 커브와 같아서 한 사람이 좋을 때가 있으면 다른 쪽은 안 좋을 때가 있다. 결혼 초기 앞으로 설거지는 누가 하고 밥은 누가 할지 정한다고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도 없다. Give, wait, and forget 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 채워진다.
마음씀씀이의 최고 경지는 Give and wait 이후 잊는 것이다. 혜민 스님이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했던가. '내 욕구에 들어서는 문’을 드나들며 잊을 때까지 멈추다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을까.
12. [마음씀씀이] Give, wait, and forget
마음씀씀이는 욕구다. 욕구는 본질이다. 2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해마다 기억나는 사람의 이름을 한 명씩 쓴다. 망설임 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간다. 몇 년 전부터 반복되어온 습관이다. 스무 명의 이름을 본다. 매번 기억하는 이름은 바뀐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이름 석 자가 보인다. 연락이 두절된 사람도 있고 애증이 섞인 법인이 빈칸을 메우기도 한다.
필자는 이를 '욕구에 들어서는 문’이라 부른다. 첫 번째 문은 '줌(give)의 문’이다. 받기 전에 먼저 주었는지 생각한다. 각성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쉼(wait)의 문’이다. 주고 나서 얼마의 쉼이 있었는지 돌아본다. 준 것을 돌려받지 않는 시간이다.
세 번째 '잊음(forget)의 문’에 들어서면 득실(得失)의 관계를 넘어서고 마음씀씀이의 소명을 확인한다. Give, wait, and forget(줌, 쉼, 그리고 잊음)은 불혹(不惑)의 세대가 되어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바꿔보려는 나의 몸부림이다.
필자 직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변화관리는 남을 향해 있다. 경영학에서 인문학과 닿아 있는 변화관리의 영역은 인간의 속성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종교인이나 심리학자의 몫임을 안다.
경영자가 특정 사안에 대해 의사결정을 달리할 수 있도록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을 변화관리라고 한다면, 학문으로서 경영학의 영역은 논리만으로 욕구를 제어하는 제한적인 영역일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스무 명의 리스트에 내 이름이 들어왔다. 나를 위한 변화관리의 시작이다. 이제 '욕구에 들어서는 문’은 나를 향한다.
줌, 쉼(give, wait)
얻으려고만 하는 A의 사례이다. 작은 직위라도 차지하려고 네트워크를 만들고 감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A는 내세울 것이 많지 않지만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욕구에 이리저리 쏠려 다닌다. 그러나 그에게 뒤늦게 찾아오는 것은 후회였다고 말한다. 주는 과정이 생략된 채 얻으려고만 하는 마음은 한 자리 차지한들 이력 한 줄의 가치도 남기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삶의 기준이다. 내가 줄 것이 없으면 사람은 모이지 않고 어디를 가도 나는 주변인이다. 마음속에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사람은 모인다.
한의학에서는 '불통즉통(不通則痛), 불영즉통(不營則痛)’이라고 하여 기혈순환이 원활하지 않을 때 통증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커뮤니케이션을 동등한 관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통하는 것이고, 이것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부산물이다.
이해득실을 따지려는 욕구는 피하기 힘들다. 좋아서 무언가 제공했다가도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아쉬워한다. 애증의 욕구에 사로잡히면 내게 돌아오는 게 무엇일지,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아닌지 트레이드오프에만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서 내가 쉼(wait)의 과정에서 경계하는 것은 내 집, 내 가족을 보호하려고 '돌도끼’를 만들려는 욕구이다. 주변을 불신하며 이끈 활동은 비능률로 이어진다. 받지 못해도 좋고, 내 믿음에 의해 내가 즐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진행하면 오히려 결과가 좋은 것은 많은 이들이 겪는 경험의 법칙이다.
경영자문을 하면서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종류의 욕구를 만난다. 원장이 보직자를, 센터장이 과장을 불신하는 것을 목격한다. 반면 반대의 액션을 취해야 할 순간이 와도 신뢰를 지키는 쪽의 입장은 '그간 그토록 나를 철저히 믿어줬는데, 이제 와서 배신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신뢰에는 신뢰로 보답하는 것은 주고받음의 과정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참으로 줄 때 그에게로 되돌려지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Give and take를 생각하기보다는 give하고 wait하라. 내가 주고 기다리면 상대도 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주고 또 주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된다. 관계의 여유가 생긴다. 예비 의료인이라면 그동안 많이 받았으리라. 나눔의 정신이라 불러도 좋다. 나 또한 원고를 붙들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give, 나아가 나눔의 시간으로 생각한다. Give and wait했는데 계속 wait해야 한다면 받아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지 않은가.
그리고 잊음(forget)
배우자처럼 무한정 퍼주고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평생 함께할 사람인데 좀 더 퍼주면 어떠리. 또한 퍼줄 게 없어도 기다려주는 게 금실 좋은 부부 아닌가. 인생은 시그모이드 커브와 같아서 한 사람이 좋을 때가 있으면 다른 쪽은 안 좋을 때가 있다. 결혼 초기 앞으로 설거지는 누가 하고 밥은 누가 할지 정한다고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도 없다. Give, wait, and forget 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 채워진다.
마음씀씀이의 최고 경지는 Give and wait 이후 잊는 것이다. 혜민 스님이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했던가. '내 욕구에 들어서는 문’을 드나들며 잊을 때까지 멈추다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