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 간납TF, 명분·실리 잃고 ‘용두사미’ 전락?

정희석
발행날짜: 2018-01-08 00:15:27
  • 착수금 2000만원 ‘김앤장’에 표준약관 의뢰…공정위 “심사 불가”

간납사(구매대행업체·GPO) 철폐를 외치며 야심차게 출발한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회장 황휘) ‘간납사 철폐 TF팀’(이하 간납TF팀)이 ‘용두사미’로 전락한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출범 초기 간납사 철폐에서 방향을 선회해 간납사 물품공급거래 표준약관 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분과 실리 모두를 잃은 채 사실상 ‘유명무실’ 해졌다는 지적 때문이다.

2015년 8월 출범 당시 간납TF팀은 “간납사들이 의료기기 제조·수입·판매업체로부터 구입한 의료기기(치료재료)를 실제 구입가격보다 높은 금액으로 의료기관에 공급하고, 그 차액 중 일부를 의료기관에 리베이트로 제공하는 비리를 자행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일부 간납사들은 담당업무에 비해 과도한 수수료를 징수하고 공급물품에 대한 대금결제 보증회피, 세금계산서 발급 지연·납품기회 차단 등 의료기기 유통질서를 교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간납사는 법적 설치 근거가 없고 계약·대금결제 등 대부분 단순 행정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치사유가 없다”며 폐지를 주장했다.

간납사 폐지는 사실 간납TF팀 출범 이전부터 의료기기업계가 대정부 건의사항으로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사안이다.

실제로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는 2013년 초 간납사 폐지를 담은 제도개선안을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제출했다.

또 같은 해 10월 28일 국무총리실 민관합동규제개선추진단과의 간담회에서도 간납사 폐지를 재차 건의했다.

당시 협회가 제출한 제도개선안을 살펴보면, 간납사가 의료기기업체와 의료기관 사이에서 ‘계약에 의한 독점적 기업 간 거래’(B2B)를 수행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공정한 유통거래를 위반하더라도 행정처분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간납사가 의료기관으로부터 의료기기·치료재료 구매업무를 위탁받아 수행하지만 의료기기법상 제조업 수입업 판매업 수리업 임대업 등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아 행정처벌 근거가 없다는 설명이다.

협회는 이에 “간납사를 폐지하거나 의료기기 도매업허가를 신설해 허가받은 사람만이 간납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매업자 준수사항을 법제화해 달라”고 건의했다.

대정부 건의사항으로 간납사 폐지를 꾸준히 제기했던 의료기기업계 노력은 간납사 제재를 위한 법적 근거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간납TF팀은 이러한 과거를 교훈삼아 민원 및 의견 제시에 그치지 않고 간납사 폐지를 ‘의료기기 중점 규제과제’로 삼아 청와대를 비롯한 복지부 식약처 심평원 등 유관기관과 국회 언론 등 다각적인 채널을 통해 구체화하고자 2015년 8월 의욕적으로 출범했다.

이후 간납사 전면 철폐에 초점을 맞춰 활동방향을 수립하고 특수 관계인의 재단직영 간납사 설립·운영 금지 등 구체적인 제도개선 실행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관련 공청회를 개최해 여론몰이에 나서는 등 업계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간납TF팀은 전면 철폐에서 간납사를 양성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면서 추진동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출범 이후 간납TF팀이 간납사 철폐를 주장했던 일부 위원들이 배제되고, 의료기관·간납사와의 갑-을 관계에 있는 의료기기업체가 간납사 철폐를 주장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서 간납사 양성화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분석이다.

2000만원짜리 표준약관? 협회가 공정위에 심사를 요청한 '의료기기 공급업자의 의료기관 구매대행사업자에 대한 물품공급거래 표준약관'
간납TF팀은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 심의를 받기 위해 ‘의료기기 공급업자의 의료기관 구매대행사업자에 대한 물품공급거래 표준약관’(이하 표준약관)을 만들었다.

표준약관은 건전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고 불공정한 내용의 약관이 통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한 거래분야에서 ‘사업자들이 최소한 지켜야하는 거래 규범’을 담고 있다.

특히 사업자 및 사업자단체가 공정위에 약관 내용이 약관규제법에 위반되는지 여부에 대한 심사를 청구하고, 이를 공정위가 승인함으로써 제정된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이 불공정한 약관을 사용하는 사업자로부터 억울한 피해를 당했을 때 보상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나아가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할 때 판결 준거가 된다.

문제는 간납TF가 빠듯한 살림의 협회 예산을 써가며 표준약관을 만들었지만 정작 공정위로부터 심사 자체가 안 된다는 답변을 받은 것.

간납TF팀 전·현직 위원에 따르면, 공정위에 심사를 요청한 표준약관은 법무법인 ‘김앤장’에 착수금 2000만원·성공보수료 500만원으로 의뢰해 만들었다.

이후 간납TF팀 위원 1명, 협회 직원 1명, 김앤장 소속 4명은 2017년 12월 6일 세종시 공정위 약관심사과를 방문해 협회 표준약관 심사 요청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공정위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표준약관을 심사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뭘까?

간납사와 사업자(의료기기업체)의 계약 관계자가 B2B이기 때문에 표준약관을 만들 수 없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의료기기사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잘 모르고, 요즘 표준약관을 제정하는 곳은 해당 관련 부처에서 만들기 때문에 공정위의 경우 공정거래법 위배 여부만 검토한다는 것.

따라서 ▲공급 물품 단가·가격조정 ▲지체상금 및 대금 지급 ▲담보 ▲재고관리·반품 ▲수수료 전가 금지 등 관련 표준약관을 통해 간납사들의 불공정 거래행위를 개선하고자했던 간납TF팀 계획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간납TF 한 위원은 “대형 로펌인 김앤장 이름만 믿고 당연히 표준약관 제정이 될 줄 알았다”며 “지난해 가을 간납TF팀과 김앤장이 회식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김앤장 쪽에서는) 무조건 된다는 분위기로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간납TF팀이 지난해 김앤장에 표준약관 업무를 의뢰한 뒤 상당기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건 사실”이라며 “협회 예산 2000만원을 썼는데 공정위로부터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아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이어 “김앤장 측은 새 정부가 들어서자 공정위 내 라인이 바뀌면서 어렵게 됐다는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협회 또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한 임원은 “협회가 예산을 써가면서 표준약관 제정을 추진한 이유는 김앤장 측에서도 승산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결과만 놓고 봤을 때 김앤장 측 예상이 빗나간 건 맞다. 우리 역시 (공정위 답변을)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이라 난감하고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간납TF팀과 김앤장이 사전에 간납사 물품공급거래 표준약관 제정이 어렵다는 점을 과연 몰랐을까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간납TF팀 내 변호사 출신 위원이 있고 또 공정위 출신 인사들이 김앤장에 포진해있는 점을 감안할 때 애시 당초 공정위 표준약관 심사가 안 된다는 점을 알고도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 제기다.

간납TF팀 前 위원은 “간납TF팀이 간납사와 의료기기업체 간 B2B 계약 관계에서 표준약관 제정 가능여부만 공정위에 제대로 알아봤어도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정위 출신 인사들이 있는 대형 로펌 김앤장이 공정위가 표준약관 심사를 해 줄 수 없다는 점을 몰랐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애초에 공정위가 하지도 않는 일에 2000만원을 써가며 김앤장에 의뢰한 협회가 결국 헛발질을 한 셈”이라며 “간납사 철폐에서 표준약관 제정으로 방향을 선회한 간납TF팀 역시 이번 일로 명분과 실리 모두를 잃게 됐다”고 꼬집었다.

오는 2월 출범할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새 집행부가 문재인 정부의 불공정·불합리한 시장지배 및 유통구조 개선 정책기조에 발맞춰 간납사 완전 철폐 카드를 다시 꺼내들지 아니면 실효성조차 희박해진 표준약관 제정을 계속 밀어붙일지 의료기기업계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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