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 '거니' 의대생
2016년 학교와의 교학간담회에서, 우리 학교 여러 곳에 턱/계단만 있는 곳을 학내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다른 친구와 함께 조사해 발제한 적이 있다. (당시 동아리방 진입 경사로 폭은 좁았고, 동아리방 화장실 및 샤워실은 대놓고 턱이었으며, 스터디룸 진입로 역시 계단이었다.)
당시 학교의 대답은 차치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현 상황에서 배리어를 인지하지 않아도 될 몸을 가진 사람이 무심코 지나갔을 때) "일상" 속에서 얼마나 "이동권"이라는 것이 인지하기 어려운지,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관련 문제가 드러나거나 개선되지 못하고 있음을 체감했다.
언젠가 횡단보도를 건너 차도에서 인도로 연결되는 부분에 있는 점자블록이 파손돼있는 것을 보았고, 또 언젠가 휠체어를 사용하는 친구와 식당에 뭔가를 먹으러 갈 때 경사로가 있는 식당을 찾는 게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우리학교의 경우 학내 장애인권 동아리에서 배리어-프리 지도를 (Barrier-Free, 생활에 방해가 되는 턱, 계단 등의 장벽을 없애거나 자막ㆍ음성지원ㆍ속기 등을 시행하는 운동이나 행동. 여행ㆍ식당ㆍ이동ㆍ영화관람 등 수많은 곳에서 시행돼야 하는 현재진행형 목표) 만들어 용이하기는 했다.
또 언젠가 엠티 및 현장 활동을 기획할 때, 접근성 및 활동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배리어-프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온전히 가능한 목표인가를 고민했다. (물론 여전히 고민 중이고, 아직 답을 모르겠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예시들이 낯설지는 않다는 점에서, 약간 (많이)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잠시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어떻게 이동권을 쟁취해왔고 현재 상황은 어떤지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자. 2001년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리프트 고장으로 인해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추락사했을 때, 보상금만 지급하고 무마하려 했던 서울지하철공사와 정부에 맞서 여러 장애 단체들은, 선로점거투쟁 등을 통해 "장애인들도 지하철을 탈 권리가 있다"고 외쳤다.
이후 4월 20일 (이날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기도 하다!) 만들어진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동권연대)'에서,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ㆍ저상 버스 도입ㆍ장애인 콜택시와 같은 특별 교통수단 확보 등을 목표로 긴 싸움을 시작했다. 많은 부분에서 진전이 있었고, 또 변화했지만 작년 서울 지하철 1호선 및 5호선 환승역 신길역 리프트에서 한 분이 추락해 사망하셨고, 장애 단체들이 지하철 1호선 집단 승/하차 투쟁을 통해 (일률적이면서 빠른 속도에 저항하며) "리프트 철폐/엘리베이터 전 역에 설치"를 알리고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을 보면, 이동권 완전 보장 및 배리어-프리는 요원해보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예전에 엠티를 기획할 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동아리에게서 "배리어-프리 엠티 매뉴얼"을 받은 적이 있다. 거기 첫 페이지에는, "장애유형과 정도에 따라 필요한 편의지원 내용이 매우 상이할 수 있으므로 장애학생과 적극적으로 상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였다. 객관적/사회적인 조건 개선과 더불어 "대상화/소비/시혜적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함"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장 기본요소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덜 시혜적으로, 동시에 장애인의 주체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각자의 "일상"속에서 "이동권"보장 및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조건을 고민하고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 의대생이고 비장애인인 "나"는, 학교에서 "병"을 "고치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며, 이를 통해 사람들의 "건강"을 향상할 수 있다고 듣는다. 동시에 "우리"는 "건강"이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라고도 배웠다.
한편, "손상"이 어떻게 "장애"가 되고, "장애"와 "질병", "정상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의학적, 사회적 모델 등에서 관점과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몸"과 내밀한 관계를 맺어나갈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인 장애담론의 특성상, 현재도 매우 활발한 논의와 행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당연해 보인다.) 각각의 관점에 대한 설명은 차치하더라도,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이동해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육을 받으며 투표를 행사하는 등,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가는 행위가 보장되는 것이 "건강권"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는 "이동권"은 자체로서도 매우 중요한 권리이자 동시에 생존권이며, 탈시설ㆍ교육권ㆍ노동권 등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이동권 보장은 "개별자로서의 삶"과 함께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돼야 하는 권리임을 확인했다. 이후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질문했으나 답을 뜯거나 하지 않(못)한 것들은 무엇일까. 또, 아직 묻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앞에서 쭉 살펴본 장애인 이동권 보장 현황이나 역사, 통계수치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아픔"에 대한 침묵을 강요당한다면, 그만큼의 자리는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들이 바뀌거나 추가돼야 권리를 구체화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몸이나 행동을 "고치려고" 하는 구조 및 방해물들에 저항하며, (방법은 다양하겠으나) "이동권"이란 당연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편을 들어 함께 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