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역학조사관'된 시립병원 의사들 9개월째 사투 중

발행날짜: 2020-10-26 05:45:57
  • 시립병원서 코로나 최전방으로 파견된 의료진 '사명감'으로 버틴다
    방역 노하우는 물론 동료들과 전우애 쌓여…'권한'이라도 명시해줘야

#카톡, 카톡. 내일 출근지는 강남이다. 시립병원 의사이지만 코로나19 확산 이후 출근지는 매일 밤 카톡으로 통보받는다. 전날 혹은 당일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지역에 따라 긴급 투입되기 때문이다. 동료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매일 일꺼리를 찾아 길을 나서는 일용직이라고들 한다. 나는 서울시 역학조사관이다.

#이태원, 쿠팡, 전광훈 목사 등 서울시 대규모 집단감염 현장에는 늘 내가 있었다. 해당 구 역학조사관이 바쁘게 코로나19 검사를 실시하면 그 추이를 지켜보고 폐쇄, 격리 여부를 결정해왔다. 집단감염 확산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객관성을 유지한 채 결단을 내리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역학조사관 업무는 예방의학과 전문의들의 진출 분야다. 역학조사를 벌이고 신종감염병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전망해 대응하고 조치를 내려야한다. 하지만 역학조사관 채용 공고를 내걸어도 지원자 1명을 찾아보기 힘들 게 현실. 그나마 최근 강동구보건소에 근무 중이던 의사 1명이 지원했다. 그는 올해 환갑을 맞았다.

이처럼 역학조사관 인력이 없다보니 서울시는 올해 초 감염병예방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서울시립병원 의사를 차출, 감염병 대응에 나섰다. 법 규정에는 28일까지 파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9개월째 파견 기간을 연장해가며 임시직으로 버티고 있다.

서울시는 시립병원 의료진을 시역학조사관으로 파견, 9개월째 방역업무를 맡기고 있다.
시간이 지난 만큼 코로나19 방역 만큼은 어디서도 두렵지 않은 역학조사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서북병원 전봉균 과장(치과)은 "떠밀리 듯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새 노하우도 쌓이고 간혹 만나는 역학조사관들과 끈끈한 전우애도 생겼다"면서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고,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도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보라매병원 역학조사관은 "초기에는 열흘씩 걸리는 업무도 어느새 하루면 끝낼만큼 다들 노하우가 쌓였다"며 "인력운영은 기둥뿌리를 뽑아서 하고 있긴 하지만 세계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잘 해나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시역학조사관 업무를 하면서 의료인이기 때문에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있지만 '언제까지 학도병만으로 전쟁을 치를 것인가'라는 고민도 함께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사실 이들 역학조사관들은 지난 2월초 코로나19 방역 대응 인력으로 파견됐을 때만 해도 1~2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다. 당장 급한 불만 끄자는 심정으로 업무를 맡은 것이 어느새 9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지난 5월, 소강기에 접어들면서 역학조사관 해단식이 있었다. 하지만 해단식 다음날 이태원에 집단감염이 확산되면서 지금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고 있다.

시립병원 의료진들은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지만 한편 해당 시립병원은 그만큼 공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서울시보라매병원 오범조 교수(가정의학과)는 코로나 방역에 파견된 지난 3~5월까지 검진센터가 문을 닫은 터라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6월 검진센터를 재개하고 수검자가 몰려오면서 방역과 병원 업무를 병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보라매병원은 서울지역 집단감염이 발생했을 당시 최대 12명의 교수진을 파견했다가 최근 소강기에 접어들면서 6~8명으로 줄였다. 서울시립병원 중 최대 규모의 의료진 파견을 맡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의료진 파견이 장기화 될 것을 감안해 대책방안을 마련해두고 있다.

오 교수는 "올해에 이어 내년까지 이어질 것을 감안해 병원 차원에서 역학조사지원단을 구축, 총괄 업무를 맡게됐다"며 "특정 과, 특정 의사가 아닌 모든 진료과목 의료진을 균등하게 파견하기로 하고, 그 전에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보라매병원의 경우 서울시가 아닌 병원 차원에서 수당을 지급해주고 있어 그나마 낫지만 상당수 시립병원은 재정상태가 열악해 기존 급여만 지급하고 있다. 서울시 측은 사태가 정리되면 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요원해보이는 게 사실이다.

역학조사관들은 역할에 대한
이처럼 '어쩌다 역학조사관'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금전적 보상보다 심리적 스트레스다.

전봉균 과장은 "집단감염지를 격리 혹은 폐쇄조치를 내리고 집에 와서는 '나의 결정으로 인해 한 가정이나 기업이 풍비박산이 나는 건 아닌지, 과연 잘한 결정인지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이어 "반대로 집단감염지역에 격리 혹은 폐쇄를 하지 않고 집에 왔을 땐 자칫 이를 계기로 확산되는 것은 아닌가 전전긍긍한다"고 덧붙였다.

오범조 교수는 "한때 특정 집단에서 대규모 확산이 발생했을 당시 코로나19 의심으로 검사를 요청하는 역학조사관에게 욕을 하고 마스크를 벗기는 등 난폭한 행동을 보였다"며 "특히 실무를 담당하는 구 역학조사관들은 직접적으로 그들을 상대하면서 공황장애를 호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특히 역학조사관들이 방역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때는 방역 대응을 위해 출동했을 때 소위 '말빨'이 안먹히는 경우다.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한의사, 치과, 간호사 등 다양한 직군에서 구역학조사관을 맡는데 의료기관 집단감염 시설로 투입했을 때 해당 병원 의사들이 '나도 의료인이니 다 안다.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라'라는 식으로 나오면 역할을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같은 이유로 이들 역학조사관들은 업무범위와 권한을 공식적으로 명시해주기를 원한다.

오 교수는 "시 역학조사관은 물론이고 구 역학조사관들 또한 업무범위를 명시해 '권한'을 공식화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며 "돌연 '역학조사관'이라는 역할만 맡기고 그에 해당하는 권한은 어디에도 명시가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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