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명 의료경제팀 기자
동의서. 온라인에서 특정 사이트에 가입을 하거나 공식적인 회의에 참석, 의료서비스 등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 진입하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절차다. 개인정보 활용 동의서, 보호자 동의서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선'을 넘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한 동의서가 의료계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분석심사를 위한 전문분과심의위원회(Special Review Committee, SRC)와 전문가심사위원회(Professional Review Committee, PRC) 위원에게 받는 '위원동의서'가 그 주인공이다.
동의서에는 '회의장 분위기를 주도하려 하지 않으며', '핸드폰 사용 금지', '회의 참여자의 발언에 면박이나 무안을 주지 않으며' 등의 문구가 명시돼 있다. 이는 동의서를 처음 접한 위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회의 시작 전이나 진행 과정에서 말로 할 법한 내용들이 명문화돼 강제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불편함을 안겨줬다. 개인적으로는 활자로까지 이 같은 표현을 하고, 동의서까지 받아야만 했을까 하는 데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이러니한 점은 심평원이 해당 동의서를 2019년 분석심사 시작 단계에서부터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도 시행 3년 만에 논란으로 떠오른 데는 대한의사협회가 분석심사에 참여를 결정키로 한 것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심평원은 지난 3년 동안 대한병원협회와 진료과 학회에서 추천한 위원들로만 분석심사를 운영해왔다. 개원가는 분석심사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의협은 올해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이미 제도가 추진되고 있는 마당에 참여라도 해서 의견을 내자는 데 뜻을 모으고 1년 동안 한시적 참여를 결정했다.
의협 추천 위원들이 PCR, SCR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위원 동의서의 불편한 문구들이 공론의 장으로 올라왔다. 심평원도 그제야 문구의 문제(?)를 인지했다. 3년의 시간 동안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심평원 관계자도 바뀌었기 때문에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당시 위원동의서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없으니 말이다. 위원동의서를 확인한 현재의 심평원은 차기 지침 개정에서 수정을 검토하기로 했다.
통상 '동의서'라는 존재는 그냥 '동의합니다'에 체크하고 서명을 하면 끝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조차도 여러 상황에서 접하는 다양한 동의서의 세부 내용을 들여다볼 생각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심사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SRC, PRC 위원들 역시 동의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확인해 볼 생각을 미처 못하고 늘 그랬듯이 무심하게 서명했을 것이다. 서명해야 할 동의서가 위원동의서 한 장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청렴서약서, 개인정보 수집 이용 및 제공 동의서 등이 더 있었으니 말이다.
개원가는 분석심사 제도 처음부터 반대 입장을 보여왔고, 제도 안으로 들어가 불합리한 부분을 들여다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심히 사인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동의서의 불편한 부분을 발견했을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관심을 커질 수밖에 없다.
분석심사는 여태껏 없었던 심사 방향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료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제도다. 그렇다면 제도를 만드는 사람도,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도 세세한 부분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이제 서명한 동의서도 내용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나아가 휴대폰 사용 금지, 면박주지 말기 같은 선을 넘는 말들이 동의서라는 형식에까지 등장하는 일이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