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학술팀 최선 기자
길치는 아니지만 대학병원에선 종종 길을 헤맨다. 소위 빅5라 불리는 대형병원들에선 그런 증상이 더 심해진다. 병원건물 사이를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구름 다리, 어디가 1층인지를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운 반지하건물(?), 옹기종기 붙어있는 의료기관·연구소를 볼 때면 필요가 생길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건물이 추가됐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세계적 수준이라는 빅5 병원조차 20~30년을 내다본 설계의 큰 그림은 찾아 어렵다는 말이다.
병원은 한 단면이다. 사회의 단면, 시대의 단면도 비슷했다. 사회적 변화의 속도가 무척 빨랐던 한국에서 대계(大計)는 대개 없었다. 아들딸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산아제한정책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1990년대 들면서 나타난 이상조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정부였다. 손바닥 뒤집듯 출산장려 정책으로 급선회했지만 대세 흐름을 꺾진 못했다. 2000년대 초 1명을 겨우 웃돌던 합계출산율은 다들 알다시피 현재 0.7명대로 떨어졌다.
변화의 속도에 가세했던 지역 대학교들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문을 닫고 있다. 이른 바 '벚꽃엔딩'. 초등학교의 폐교 소식은 누적된 노출 빈도에 따라 충격의 한계효용에 다다랐다. 한때 경쟁률의 지표였던 교대도 미달 위기라는 불똥을 맞았다. 미래를 정확히 예상하지 못한 건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다만 0, 1, 온과 오프 버튼만 있는 스위치처럼 냉탕과 열탕을 오가는 '못 먹어도 Go'식 정책은 변화의 속도와 흐름 앞에 항상 외통수를 맞았다.
2025년 한국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불과 1년 남짓 남았다. 역시나 고령사회로의 진입은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빠르다. 이와 관련된 키워드는 고령화와 저출산, 인구절벽으로 인한 필수의료의 공백, 즉 사람·인력이 공통분모다. 필수의료 인력 공백을 구실로 정부가 꺼낸 카드는 의대 정원 확대.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응급의학과, 흉부외과 등 돈 안되고 힘든 기피과에 일할 사람이 없으니 의사를 많이 뽑으면 해결된다는 발상은 앞서 살펴봤던 임기응변식 정책과 다르지 않다.
왜 산부인과에 지원하지 않느냐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의사를 1000명, 10000명을 늘려도 결과는 똑같다. 돈 안되고 힘들고, 자칫 소송으로 파산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릎 써야 한다면 기피과에 지원하지 않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공급과 수요가 경제 참여자들의 자발적인 조율로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공급-수요 곡선은 경제학에서나 작동할 뿐 정부가 건강보험 수가를 결정하는 현행 보험 체계에선 인위적인 왜곡을 낳을 뿐이다.
자세히 보면 필수의료 문제는 사회의 다른 단면과 닮았다. 이공계 엑소더스로 대표되는 의대 지원자 쏠림 현상은 의대를 통한 '미래 혜택'의 총합이 이공계에서의 미래 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의대 지원자 쏠림 현상을 막겠다고 공대 증설 카드를 꺼내든다면 어떨까. 지방의 인력 유출을 막겠다고 지방에 위성 도시를 여럿 만든다고 한다면 어떨까. 지방 이탈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은 그 어떤 땜질 처방도 해결책이 될 순 없다. 이것이 의대 정원 확대의 본질이다.
100년 전 누군가는 조선의 미를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했다. '무기교의 기교'라고도 했다. 계획이 없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무질서함을 누구는 아름다움의 원형으로 봤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욱이 행정은 보다 치열하고 치밀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변화의 속도가 무척 빨라졌기 때문이다.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건 골병 든 기피과에 대한 적절한 처방이 아니다. 왜 사람이 떠났는지를 살피는 게 진단의 첫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