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와 의정갈등

고상백 교수
발행날짜: 2024-10-30 05:30:00
  • [연재 칼럼]고상백 교수의 의학과 미술

그리스 화가 리트라스(Lytras)의 그림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제목으로 볼 때 앞에 누워있는 남자는 장례를 치르지 못한 폴리네이케스, 뒤에 서 있는 여자는 그를 애도하는 안티고네로 추정된다. 폴리네이케스에게 밝은 명암을 사용한 것은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그의 죽음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반면, 안티고네가 어둠 속에 배치된 것은 단순한 미술적 표현을 넘어, 그녀의 내면과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어둠은 죽음, 비극적 운명, 그리고 사회적 고립을 상징하는데, 이 그림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시각화하고 있다.

니키포로스 리트라스 작 <폴리네이케스 앞에 선 안티고네>(1865)Nikiforos Lytras. Antigone in front of the dead Polynices (1865).

만약 안티고네에게 약간의 빛이 비춘다면, 이는 그녀의 도덕적 의지와 순수성, 혹은 그녀가 추구하는 정의를 수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안티고네를 어둠 속에 배치함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예고하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 중 최고의 작품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두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아버지의 자리를 두고 서로 싸우다 전쟁에서 모두 전사한다. 새로운 테베의 왕인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게는 명예로운 장례를 치르게 한다.

그러나 이웃나라의 힘을 빌려 권력을 얻으려 했던 폴리네이케스를 반역자로 간주해 그의 장례를 금지하고, 시신을 들판에 방치하라고 명령한다.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경고하며, 이 명령은 곧 국법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티고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왕의 명령인 국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의무를 다해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를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면서도 크레온의 명령에 반대해 신의 법과 가족의 의무를 따라 오빠의 장례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동생 이스메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혼자서 오빠의 시신에 흙을 뿌리며 장례 의식을 감행한다.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지만, 두 사람 모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파국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의 중재는 크레온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크레온은 반역자인 안티고네를 처벌하기 위해 언로를 차단하고, 자신의 명령에만 집중한다.

그는 국가를 위한 자신의 결정을 옳다고 확신하며, 그의 강박은 절정에 이른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죽음으로 향하는 충동에 이끌려 그 길을 선택한다. 안티고네가 살아 있지만 무덤에 갇히면서 상황은 모순과 역설을 드러낸다.

크레온의 국법은 옳지만, 동시에 옳지 않다. 안티고네가 따르는 신의 법이 가족에 대한 의무가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다. 크레온의 아내 에우뤼디케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무너져간다. 크레온은 뜻을 관철했지만, 가족과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을 오마쥬한 '썩은 잎(La Hojarasca)'이라는 작품을 썼다. 마르케스의 대표작인 '백년의 고독'은 '썩은 잎'이라는 초기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썩은 잎'이라는 작품에는 마콘도라는 마을, 대령, 그리고 바나나 농장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야기는 의사의 시체를 두고 대령과 마을 사람들이 갈등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점에서 '안티고네'와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상황과 접근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의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장례를 거부당할 정도로 인심을 잃었을까? 발단은 바나나 회사의 도착에 있다. 회오리바람처럼 갑작스럽게 마을에 나타난 바나나 회사는, 그 뒤에 썩은 잎들이 따라오면서 마콘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콘도는 본래 약속의 땅이자 평화의 상징이었으나, 바나나 회사의 도착 이후 몇 년간 머물면서 마을에 번영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을의 미래를 앗아가는 주체가 되었다.

아라미스 구티에레스. 백년의 고독 이후 (2007)Aramis Gutierrez, After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2007)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처음에 '집'이었다. 그러나 클레멘테 마누엘 사발라가 쓴 기사에 영감을 받아 제목이 '썩은 잎'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사발라는 '썩은 잎'을 '원래의 것에 상처를 입히고 궁지에 몰아넣는 이상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 표현은 작품의 주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썩은 잎'은 마콘도의 변화와 그로 인해 발생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회오리 바람이 마을 한가운데 뿌리를 박은 듯 소용돌이 치는 속에서 한 남성이 마을 위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마콘도에 등장한 비극적인 역사와 혼란을 상징하고 있다. 구티에레스는 여기에 몽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적용하여, 현실과 환상이 혼합된 마법적 사실주의를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부드러운 색조와 함께 그림에 흐르는 고요함은 폭풍 속의 혼돈과 대비되며, 마콘도에서 사는 인물들이 겪는 내적 고독과 외부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람에 휩쓸리는 인물은 소설 속 마콘도의 주민들이 겪는 불가피한 변화와 파멸을 상징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고독과 역사의 반복성을 드러내고 있다.

두 작품에서 드러난 갈등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의정갈등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갈등이 심화될 경우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와 국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비극적 결말이나 마콘도의 쇠락처럼, 현재 진행 중인 의정 갈등도 결국은 양측 모두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갈등은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상호 배제적인 두 주장의 충돌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정당성이 충돌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핵심이다. 크레온은 자신의 명령을 고수하여 뜻을 이루었지만 모든 것을 잃었고, 안티고네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켰다.

'안티고네'의 역설을 우리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의료계의 전문성을 인정하며 진정한 대화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크레온의 결정을 신에 대한 도전인 '휴브리스(hubris)'로 해석하며, 크레온 가문에 불행을 불러올 것이라 예언했다.

휴브리스는 지나친 자만이나 오만으로 신이나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크레온은 자신의 명령을 철회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비극적인 결말을 피하지 못한다. 이러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의료계에 덥친 회오리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조속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정책적 실패가 아니라 의정 갈등 해소와 국민 건강 보호의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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