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환자에서 공감의 주인공으로

고상백 교수
발행날짜: 2025-09-08 05:00:00
  • 고상백의 의료인문학 칼럼

우리는 병원에 갔을 때, 환자의 신음보다는 의사의 목소리를 먼저 듣게 된다. 검사수치, 진단명, 예후, 치료 방침이 오가지만, 그 자리에 있는 환자의 고통과 목소리는 자주 침묵 속에 남겨지는 경우가 있다. 의학의 역사와 예술의 이미지는 이러한 상황을 오래전부터 기록해왔다. 미술 작품 속에 환자는 때로는 무대의 소품처럼, 때로는 생명을 지탱하는 희미한 불빛처럼 그려졌다. 그러나 그 흐름은 변화해왔고, 이제 우리는 환자를 중심에 두는 새로운 리듬을 모색하고 있다.

쟝 바티스트 오드리의 작품에는 두 명의 의사가 등장한다. 한 명은 환자의 상태를 보며 절망적인 진단을 내리고, 다른 한 명은 곧 회복할 것이라며 근거 없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논쟁에서 패배하는 이는 환자 자신이다. 그는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장 바티스트 우드리는 이 우화를 판화로 옮겨, 병상에 누운 환자와 그 곁에서 토론을 벌이는 두 의사의 모습을 날카롭게 풍자했다.

그림. 쟝 바티스트 오드리. 비관적인 의사, 낙관적인 의사, 18세기 초반Jean-Baptiste Oudry. Dr Fear-the-Worst and Dr Hope-the-Best. 18C

작품 속에서 환자는 침대에 힘없이 누워 눈조차 뜨지 못한다. 옆에는 음식이나 약을 담았을 법한 식기가 있지만, 그것은 무용지물처럼 방치되어 있다. 반대로 의사 두 명은 당당하게 서서 제스처를 취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왼쪽 의사는 얼굴을 굳힌 채 환자의 상태를 단념하는 듯하고, 오른쪽 의사는 손가락을 치켜들며 마치 설교자처럼 환자가 곧 일어날 것이라 떠든다.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은 환자와는 무관하다. 환자는 침묵 속에, 의사들의 말싸움 속에, 고립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진료 풍경이 아니다. 침대를 감싸는 커튼은 마치 무대의 장막처럼 보이고, 의사들의 제스처는 배우의 연기를 닮았다. 환자는 돌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대 위 소품처럼 존재할 뿐이다. 우드리는 이 연극적 구도를 통해, 당시 의학이 얼마나 환자를 외면한 채 지식과 말의 과시에 매몰되어 있었는지를 드러냈다. 환자의 고통은 침묵 속에 남겨지고, 의사의 권위는 과장된 손짓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판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지 18세기 의학을 비웃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전문가들의 토론과 학문적 권위가 환자의 목소리를 가릴 때가 있다. 환자가 직접 경험하는 고통과 필요는 논쟁 뒤로 밀려나고, 제도와 담론만 앞세워지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결국 라 퐁텐의 우화가 던지는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말로만 오가는 진단과 협진은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림. 루크 필데스. 의사, 1891Luke Fildes. The Doctor, 1891

그러나 19세기 말 루크 필데스의 회화 'The Doctor'는 전혀 다른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 속 의사는 병든 아이 곁을 밤새워 지켜보고 있다. 고개를 떨군 부모는 뒤에서 절망에 잠겨 있지만, 의사는 아이의 미약한 숨결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의료 기구나 과학적 장치는 거의 보이지 않고, 오직 환자와 그 곁을 지키는 의사의 태도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필데스는 의료의 본질이 권위나 지식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과 삶에 공감하는 마음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환자를 무대의 소품이 아닌, 돌봄의 중심에 놓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감동을 준다.

현대에 와서는 환자를 중심에 두려는 의료의 흐름이 예술 속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네이트 루이스의 작품을 마주하면, 화면 위에서 파동처럼 흔들리고 엇박으로 울리는 리듬이 느껴진다. 그는 전직 중환자실 간호사였고, 환자의 몸과 삶이 결코 일정하거나 규칙적인 흐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병은 예고 없이 찾아와 일상의 박자를 깨뜨리고, 고통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환자의 몸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루이스는 이 불규칙한 리듬을 'Syncopated Current', 곧 엇박으로 흐르는 파동의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그림. 네이트 루이스. 엇박, 2024 Nate Lewis. "Syncopated Current IX," 2024

그가 종이를 조각하고 잉크로 겹겹이 쌓아 올린 인물들은 단순한 해부학적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환자의 경험과 고통을 품은 몸이다.

정밀하면서도 흔들리는 패턴은 환자의 숨결처럼 불규칙하고, 때로는 심장 박동의 부정맥처럼 긴장감 있게 울린다. 이것은 환자의 목소리와 경험이 규범적 의학의 리듬 속에서 종종 잘려 나가고, 또다시 연결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닮아 있다.

환자 중심 의료란 바로 이 엇박의 리듬을 억지로 교정하지 않고, 환자의 흐름에 귀 기울이며 의료가 맞춰 나가는 태도이다. 루이스의 작품은 돌봄이란 지식이나 권위가 아니라, 환자의 불규칙한 삶의 리듬을 인정하고 함께 호흡을 맞추는 과정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의사와 간호사, 환자와 가족은 서로의 다른 박자를 듣고, 그 안에서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우드리의 판화가 '말뿐인 협진'의 무력함을 풍자했다면, 필데스의 회화는 '환자를 중심에 둔 돌봄'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루이스의 작품은 그 흐름을 현대적으로 확장해, 환자의 불규칙한 목소리를 예술의 리듬으로 번역하고 있다. 결국 Syncopated Current는 혼란스러운 엇박이 아니라, 환자와 의료진이 함께 만들어 가는 살아 있는 돌봄의 음악이다. 그 리듬 속에서 비로소 환자는 소품이 아닌 주인공으로, 의료는 권위가 아닌 동반자로 자리 잡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의료가 직면한 과제는 단순히 새로운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이 아니다. 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삶의 리듬에 발맞추는 일도 병행하여야 한다. 풍자 속 환자의 침묵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공감과 동행의 음악을 함께 연주할 것인가. 의료의 선택은 결국 사회가 어떤 인간상을 소중히 여기는가와 직결된다. 환자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작은 실천이야말로, 미래의 의학을 따뜻하게 비추는 강력한 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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