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을 오래 사랑하기 위해

가톨릭관동의대 1학년 정지은
발행날짜: 2025-12-08 05:00:00
  • 가톨릭관동대학교 본과 1학년 정지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학이라는 학문이 유독 흥미로웠다. 누군가의 몸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변화들을 읽어내는 일이 신기했고, 지식이 쌓일수록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이 보인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래서 의대를 꿈꿨고, 결국 그 길 위에 서게 되었다.

휴학을 마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온 첫 학기의 시작은 심장 파트였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야말로 공부가 재밌었다. 심장이 전기 자극을 받아 움직이는 방식, 압력 변화로 판막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들, 구조들이 서로의 빈틈을 정확히 메우며 돌아가는 정교함이 경이로웠다.

모르는 개념들이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그림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는 경험이 이어졌고, 그 과정 자체가 공부하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선배들이 말하던 "본과는 버겁다"라는 말을 들었어도, 그때의 나는 그 말이 왜 나오는지 실감할 수 없었다. 공부가 어렵다는 감정보다 '배운다'는 감정이 먼저였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본과 수업의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과목이 바뀌고 강의록이 매일 쌓이기 시작하면서, 의학을 향한 흥미는 서서히 압박과 의무감의 무게 속으로 밀려났다. 처음에는 흥미로웠던 내용들도 "오늘 안 끝내면 내일 밀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내용의 의미보다 양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공부에 쫓기는 느낌. 내가 공부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공부가 나를 끌고 가는 느낌. 그 감정이 하루하루 깊어졌다.

그러는 사이, 나는 하루 세네 시간 남짓 자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아이패드를 열었고, 밥을 먹는 동안에도 암기를 반복했다. 누워도 머릿속에서 외우지 못한 내용이 흘러나왔고, 꿈속에서도 족보 문제를 풀고 있었다.

좋아서 시작한 공부인데, 어느새 좋아하는 마음이 도리어 나를 몰아붙이는 힘이 되어 있었다. 호기심 대신 초조함이, 성취감 대신 압박이 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님을 알면서도 멈추기 어려웠다.

그러다 최근 내분비학 시험이 끝나고 난 뒤 처음으로, 나는 멈춰서 내 상황을 바라볼 시간이 생겼다.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보다, '이제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다'는 안도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여유 속에서, 나는 드디어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본과 생활을 보낼 수 있을까?"

천천히 생각해보니, '의학을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만으로는 이 시간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분명 시작을 끌어주는 불씨였지만, 그것만으로는 긴 시간을 하나의 방향으로 밀어주는 힘이 되지 못했다.

내가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이유도 결국 더 잘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바람이 나 자신을 압박하는 기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마음을 지나치게 다그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닿았다.

나는 여전히 의학이 좋다. 하지만 의학을 향한 열망이 아무리 크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건강하게 유지되지 않으면 그 마음 또한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학을 통해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나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좋아하는 마음을 오래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길을 걷는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나는 공부의 양이나 속도만을 기준으로 하루를 판단하기보다, 어떤 마음과 어떤 상태로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에 더 귀 기울이려 한다.

의학이라는 넓고 깊은 세계를 탐구하면서도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조금씩 익혀가는 시간, 좋아하는 마음이 무거운 짐으로 바뀌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감각,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는 나를 잘 챙기는 태도. 이런 것들이 결국 내가 이 길을 오래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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