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R&D 본토 소환령…K-임상의 조용한 추락

발행날짜: 2026-02-23 05:30:00
  • 본토 임상해야 약값 보전 압박…미국 우선주의 속에서 지위 흔들
    외형 성장 반면 초기 임상 제자리…글로벌 연구 'Cap' 씌우는 제약사

[메디칼타임즈=문성호 기자]대한민국이 그동안 구축해온 '글로벌 임상 허브'의 지위가 유례없는 대외적 파고에 직면했다.

특히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기치로 내건 트럼프 행정부가 제약·바이오 R&D 공급망 전반을 미국 본토로 강제 소환하면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 내 신규 임상 추진에 사실상 '캡(Cap·상한선)'을 씌우는 현상이 임상현장에서 포착되고 있다.

사실상 그동안 임상현장에서 강점으로 통해 온 임상 강국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약값 깎으려면 미국서 임상…거세진 '본토 소환령'

최근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는 단순히 약가를 낮추는 수준을 넘어, 신약 개발의 핵심인 임상시험과 R&D 인프라를 미국 본토로 소환하는 '패권 시프트'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미국 '최혜국 약가(Most-Favored-Nation Pricing, MFN)' 정책 압박이 R&D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3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정부는 글로벌 빅파마들을 상대로 약가 인하 협상을 진행하면서 그 대가로 미국 내 대규모 투자와 임상 수행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최근 애브비(AbbVie) 등 주요 기업들이 관세 면제와 약가 인하 보전의 조건으로 향후 10년간 미국 내 R&D 및 제조 시설에 1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확약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주목할 점은 미국의 '신약 승인 혜택'이다.

미국 정부는 본토에서 임상을 진행하고 제조 시설을 갖춘 기업에 대해 '1개월 내 초고속 심사'와 '서류 간소화'라는 파격적인 당근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정된 R&D 예산을 한국 등 해외 사이트가 아닌 미국 본토 임상에 우선 배정하게 만드는 강력한 유인책이 되고 있다.

임상현장에서는 이 같은 미국의 정책 압박에 따라 글로벌 제약사들이 국내 임상 추진에 사실상 상한선(Cap)을 씌워 진행하는 경우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례는 글로벌 신약개발 트렌드로 자리 잡은 항암신약 임상시험에 집중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급종합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글로벌 본사에서는 이제 한국 시장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지도 않는 것 같다"며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 마냥, 기존의 루틴만 반복하거나 아예 우선순위에서 지워버리는 분위기다. 현장에서는 환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매일 듣고 있는데, 정작 약을 공급하고 임상을 결정하는 본사는 냉담하기만 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에 배정되는 임상 프로젝트와 환자 수에 사실상 '캡(Cap)'이 씌워졌다는 점"이라며 "임상 참여 의지가 높고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도 본사에서 정한 상한선 때문에 더 이상 환자를 넣지 못한다. K-임상이 자랑하던 '속도'와 '효율'이 글로벌 정책이라는 벽에 막혀 강제로 멈춰 선 상태"라고 우려했다.

더구나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정책 변화도 'K-임상'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다. 최근 FDA는 신약 승인 시 미국 내 실제 환자군을 반영한 '인종적 다양성(Diversity Plans)' 데이터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 등 아시아권에서 확보한 우수한 임상 데이터만으로도 승인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미국 본토 데이터가 일정 비중 이상 포함되지 않으면 승인 검토조차 거부되는 분위기다.

실제로 최근 존슨앤존슨(J&J)의 이중항체 항암제 '리브리반트(아미반타맙)' 피하주사(SC) 제형이 두경부암 혁신신약(BTD)으로 지정받는 과정에서도, 미국 중심의 빠른 임상 설계와 현지 데이터 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성서울병원 박연희 교수(혈액종양내과)는 "과거 키트루다(펨브롤리주맙) 임상 당시를 돌이켜보면, 부작용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치료 기회를 찾으려는 환자와 의료진의 열의가 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며 "당시 우리 병원 단 한 곳에서만 40명의 환자를 등재할 수 있었고, 그렇게 쌓인 데이터가 글로벌 가이드라인의 초석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박연희 교수는 "최근 유방암 분야 수술 전 보조요법(Neoadjuvant) 임상이 진행 중인데, 과거 연구 때 혼자서 40명을 넣었던 세팅과 유사하지만, 이번엔 한국 전체에 배정된 '캡(Cap)'이 고작 30명에 불과하다. 한 기관이 소화하던 물량보다 적은 인원을 국가 전체 물량으로 묶어버린 셈"이라고 꼬집었다.

최근 5년간 KRPIA 회원사 임상연구 현황이다. 3상 임상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으나, 신규 진입의 척도인 초기 임상의 질적 입지는 글로벌 정책 변화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숫자는 성장 중이나 체감은 절벽"…지표의 역설

문제는 임상강국으로서의 입지가 흔들린다는 위기감이 임상현장을 넘어 제약‧바이오 업계 전반으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가 발표한 '최근 5년간 임상연구 현황' 지표는 이러한 위기감을 반증한다. 외형적으로는 연평균 3.1%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세부 데이터를 뜯어보면 '신약 개발의 꽃'이라 불리는 초기 임상의 위축이 뚜렷하다.

특히 2024년 들어 총 임상 건수가 감소세(-1.9%)로 돌아선 지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약업계 전문가는 "3상은 기존에 계약된 장기 프로젝트가 많아 당장 수치 하락이 덜해 보이지만, 신규로 들어와야 할 1, 2상 단계에서 '코리아 패싱'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미국 본사가 R&D 예산을 본토로 회수하면서 한국 지사가 따올 수 있는 초기 임상 물량에 사실상 상한선(Cap)이 걸린 상태"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1, 2상 임상시험의 경우 호주 등 다른 국가로 패권이 옮겨 갔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결국 미국이 임상 주권을 강화하며 글로벌 공급망을 독점하려 들면서, 한국은 안방 임상 시장마저 내줄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서울 상급종합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예전에는 한국이 초기 임상에서 독보적이었지만, 지금은 규제 당국의 보수적인 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 글로벌 본사 입장에서는 신속한 승인이 관건인데, 우리 식약처가 '위험성'을 이유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면 본사는 미련 없이 한국을 명단에서 뺀다"며 "다 같이 시작하기로 했던 다국적 임상에서 대만, 일본, 미국은 열리는데 한국만 빠지는 상황이 이제는 간간이, 꽤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분당차병원 전홍재 교수(종양내과)는 "호주 같은 나라는 초기 임상 승인을 엄청나게 자유롭게 풀어주며 시장을 흡수하고 있다"며 "원래 한국이 환자 등록을 워낙 잘해줘서 글로벌 물량을 흡수했었는데, 이제는 식약처의 보수적 기준 때문에 초기 임상 포션(Portion)을 호주에 다 뺏기고 있는 형국"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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