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간판 바꾸기 전에, 먼저 반성부터 '지역·필수·공공의료실' 신설, 국민을 위한 것인가 행정을 위한 것인가
보건복지부가 올해 상반기 중 '지역·필수·공공의료실'을 신설한다고 밝혔다. 필수의료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이를 전담할 실장급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연간 1조 1,300억 원 규모의 특별회계도 설계 중이고, 5년간 총 4조 원에 달하는 신규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숫자만 보면 대단한 의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 기대가 전혀 없다. 아니, 기대가 없는 것을 넘어 이것이 국민을 향한 또 하나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 책임 없는 곳에 해법도 없다
지금 한국 의료가 처한 위기—응급실 공백, 소아과 붕괴, 지역 의료 소멸—는 하루아침에 생긴 일이 아니다. 수십 년간 누적된 정책 실패의 결과다. 그 정책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집행해 온 주체가 바로 보건복지부다.
그런데 지금 그 보건복지부가 새 조직을 만든다고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정책이 실패했고, 왜 실패했으며, 누가 책임을 졌는지에 대한 평가 한 줄이 없다. 그저 '법이 통과됐으니 조직을 만들겠다'는 행정적 논리만 있을 뿐이다.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새 조직은 새로운 예산 낭비의 창구가 될 공산이 크다. 2026년 보건복지부 예산은 137조 원이다. 이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면서 현장의 전문가들, 의료 일선의 의사들, 그리고 정작 의료를 이용하는 국민들과 얼마나 깊이 소통했는가? 거버넌스를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형식적 절차만 갖춘 채 독단으로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 순환보직이 만든 전문성의 공백
보건복지부 내 순환보직 관행은 정책의 질을 떨어뜨리는 구조적 원인 중 하나다. 복잡한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수년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1~2년 만에 바뀐다. 의료 현장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법과 예산을 다루다 보니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지역·필수·공공의료실이 생겨나도 결국 같은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예산만 낭비하는 부서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 국회와 의료계, 각자의 직무유기
잘못된 정책을 견제해야 할 국회는 어땠는가.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채, 얕은 지식으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했다. 필수의료 공백이 현실화되는 동안에도 정치적 셈법에 따라 움직였다.
대한의사협회도 자유롭지 않다. 전문가 집단으로서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정부 정책에 날카로운 비판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의협은 권력 다툼에 함몰돼 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전문가 단체는 존재 가치를 잃는다.
■ '필수의료'라는 말의 함정
'필수의료'라는 개념 자체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 생명이 위태로운 응급 상황만을 필수의료라 부를 것인가? 만성질환 관리, 소아 발달 평가, 정신건강 돌봄도 삶의 질과 생명에 직결된다. 개념의 범위가 좁을수록 정책의 사각지대는 넓어진다.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응급의료와 중환자 진료에서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사법 리스크다. '환자가 사망하면 의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서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어떤 유능한 의사도 고위험 진료 현장에 자원하려 하지 않는다. 코로나 유행 당시에도 경험했듯, 국민과의 소통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노력은 거의 전무했다. 제도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 진짜 해법은 겸손에서 시작된다
해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방향은 오히려 단순하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열린 마음으로 전문가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것, 정치인들이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고 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정치 색채가 강한 시민단체는 배제해야 한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국민의 목소리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산과 법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는 투명한 반성과 개방적 소통에서 비롯된다. 지금 보건복지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새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과오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더 겸허한 자세로 현장에 다가가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반성 없는 움직임은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 뿐이다. 한국 의료를 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흐름을 되돌리려면, 먼저 그 흐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진정한 책임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