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의과대학 고상백 교수

[메디칼타임즈=고상백 교수]오늘날 '발전'이라는 말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성장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20세기 후반까지 국가의 발전 수준은 주로 국내총생산(GDP)이나 소득 증가와 같은 경제지표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지표만으로는 인간의 삶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경제가 성장해도 사람들의 삶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역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리나라의 소득 수준은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하지만, 행복지수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특히 최근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적 성취에 비해 삶의 만족도나 행복 수준이 낮은 국가로 평가된다. 더 흥미로운 점은 세대 간 차이다. 젊은 세대보다 노년층의 행복 수준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국제사회에서는 발전을 바라보는 기준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2009년 프랑스에서 구성된 스티글리츠 위원회(Stiglitz Commission)는 경제적 성취만으로는 사회의 발전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삶의 질과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려하는 새로운 지표 체계를 제안하였다. OECD 역시 'How's Life?' 보고서를 통해 소득뿐 아니라 건강, 환경, 사회적 관계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는 웰빙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발전의 목표가 단순한 경제성장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OECD의 더 나은 삶의 지수(Better Life Index)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지표는 소득과 고용뿐 아니라 건강, 교육, 환경, 시민참여, 사회적 관계 등을 함께 평가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적 지표에서는 높은 수준을 보이지만 사회적 지표와 환경 지표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사회적 관계이다.
이 보고서는 삶의 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동안 삶의 질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개인의 생활습관이나 위험요인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흡연, 음주, 운동 부족과 같은 개인의 건강행동을 개선하면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는 접근이다. 물론 이러한 요인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삶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와 같은 구조적 요인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관계는 단순히 인간관계의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신뢰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연결망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삶의 만족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건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건강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가운데 약 30~55%가 사회적 요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사회적 지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평가된다.
사회적 관계와 건강 사이의 연관성은 국내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원주와 평창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장기 코호트 연구에서는 사회적 지지 수준과 심뇌혈관 질환 발생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사회적 지지가 낮은 집단은 높은 집단에 비해 심장질환과 뇌혈관질환의 발생 위험이 유의하게 높은 것으로 보고하였다. 특히 대사증후군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 그 위험은 약 2.4배까지 증가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건강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생활습관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사회적 관계와 같은 환경적 요인을 함께 고려해야 함을 보여준다.
고령화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거노인의 비율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노인들이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 원주-평창 코호트 연구에서는 이러한 외로움이 단순한 감정적 문제를 넘어 인지기능 저하와 뇌 구조 변화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로움이 높은 집단에서는 기억력과 실행기능 등 여러 인지 영역에서 저하가 나타났으며, 뇌 영상 분석에서도 전두엽을 비롯한 일부 영역의 뇌 용적 감소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동안 많은 정책이 개인의 위험요인을 줄이거나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 환경을 강화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고 협력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속가능발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발전은 흔히 환경 보호나 경제 성장의 균형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그 핵심에는 인간의 삶의 질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지수와 삶의 만족도 사이에는 매우 높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지속가능발전 수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국민의 삶의 만족도 또한 높은 경향을 보인다. 특히 북유럽 국가들은 지속가능발전 지수와 행복지수 모두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지속가능발전은 단순히 경제와 소득수준에 맞추는 정책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삶의 질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서로를 지지하고 협력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환경과 삶은 더욱 건강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지역사회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계획할 때 이러한 점은 특히 중요하다. 경제적 발전이나 물리적 인프라 구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주민들이 서로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지역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참여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지속가능발전의 핵심은 관계이다. 경제적 성장이나 기술적 발전만으로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연결, 그리고 서로를 지지하는 공동체가 있을 때 비로소 사회는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속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지역공동체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되며, 그것이 바로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