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살아남은 자'의 임계점

발행날짜: 2026-04-20 05:00:00
  • 의료산업2팀 최선 기자

[메디칼타임즈=최선 기자] 최근 의료기기 업체들을 취재하면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까다로운 인증 절차와 인허가, 급여 등재라는 여러 관문을 뚫고 해외 시장까지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기업인의 집요함과 생존 본능에 가까운 실행력에 경외감마저 든다. 미국-이란 충돌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적 리스크에 고환율까지 겹친 '뉴노멀' 환경에서는 더 그렇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최근 현장에서 들은 몇 가지 이야기들이 단순한 '경영 애로' 수준을 넘어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수입 의료기기 업체는 매년 10% 이상 매출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1500원에 근접하자 내부적으로 비상 경영에 들어갔다. 매출은 늘었지만 남는 돈이 없다는 것. 환율이 오르면서 원가는 20~30%씩 뛰었는데, 판매 가격은 건강보험 수가에 묶여있다. 결국 이 회사는 유동성 확보를 위해 대출까지 검토하는 상황에 놓였다. 숫자로 보면 성장 기업이지만, 실제 체감은 '버티는 기업'에 가깝다.

의료 현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사기, 장갑 같은 필수 소모품 가격이 15~20%씩 올랐지만 병원은 이를 반영할 방법이 없다. 현재 수가 체계에서는 이러한 소모품들이 대부분 '산정 불가' 항목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라는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현행 건강보험 수가 체계는 임상적 필요성과 안전성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문제는 그 외의 변수들이 지나치게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환율이나 원자재 가격과 같은 시장 변수는 사실상 고려 대상이 아니다. 수입 의료기기의 경우 환율이 1200원에서 1500원으로 오르면 원가는 25% 상승하지만, 수가는 그대로다. 그 차이는 고스란히 기업이 떠안는다. 의료기관도 마찬가지다. 필수 소모품 가격이 급등해도 이를 별도로 보전받을 수 없다. 행위 수가 안에 포함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비용 상승은 병원이 감당해야 하고, 이는 곧 경영 압박으로 이어진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이대로라면 일부 품목은 수입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업계의 말이었다. 수익이 나지 않는 구조가 지속되면 기업은 결국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하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경제적 선택이지만 의료 영역에서는 그 결과가 단순한 '시장 재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정 의료기기나 소모품의 공급이 흔들리는 순간, 그 피해는 곧바로 환자에게 전가된다. 치료 지연, 대체재 사용, 의료 질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정부도 외부 변수의 파급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최근 고유가 부담이 커지자 국민 70%를 대상으로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내놓은 것은 이같은 문제 인식의 반영. 다만 의문은, 국가 경제 전반에는 신속하게 개입하면서, 왜 의료 시스템 내부의 가격 구조는 여전히 '고정된 틀'을 유지하냐는 데 있다. 이 지점은 "왜 의료만 예외여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의료는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가격 통제가 필요하다곤 하지만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일수록 시스템은 더 유연해져야 한다. 지금처럼 환율과 원자재 가격 변동을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는 위기 상황에서 의료 공급망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해법은 여러 산업에서 참고할 수 있다. 일정 환율 구간을 기준으로 수가를 연동하거나, 수입 비중이 높은 의료기기와 필수 소모품에 대해 원가 변동을 일부 반영하는 장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또는 지금처럼 행위 수가에 묶여 있는 치료 재료를 분리해 별도 보상 체계를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제도'가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제도'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예고 없이 반복되고, 환율과 원자재 가격은 언제든 출렁인다. 그때마다 임시 처방으로 대응하기보다,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다.

취재를 하며 만난 업체들과 의료기관들은 "버티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했다. 버팀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문제는 산업을 넘어 국민의 의료 접근성과 안전으로 번진다.

비용 부담을 민간에 그대로 떠넘기는 구조를 유지하기엔 '살아남은 자'의 인내와 희생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판단이 든다. 이제는 버티는 주체의 체력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충격을 분산하고 흡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왜 의료만 예외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의료만 예외일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해답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오피니언 기사

댓글

댓글운영규칙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더보기
약관을 동의해주세요.
닫기
댓글운영규칙
댓글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으며 전체 아이디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