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3주년]글로벌 패러다임 '합병증 통제' 우선, 의료현장과 괴리
급여 진입한 '오젬픽' 삭감 공포…처방전 접는 진료실

[메디칼타임즈=문성호 기자] 2형 당뇨병 치료의 패러다임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단순히 혈당 수치만을 낮추던 과거의 방식을 탈피해, 환자의 기저질환과 합병증 위험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환자 중심 맞춤형 통합 치료'가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미국당뇨병학회(ADA)와 대한당뇨병학회(KDA) 등 국내외 학계는 이미 두터운 임상적 근거를 바탕으로 진화된 치료 지침을 제시하고 있으나, 국내 임상 현장의 시계는 보수적인 급여 기준에 묶여 제자리에 멈춰 서 있다는 지적이 매섭다.
시계 멈춘 당뇨병용제 일반원칙
최신 글로벌 가이드라인이 명시하는 치료의 종착지는 명확하다. 단순한 당화혈색소(HbA1c) 강하를 넘어, 심혈관 및 신장 합병증 예방과 환자의 수명 연장, 삶의 질(QoL) 개선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 비만 치료제로도 각광받는 GLP-1 수용체 작용제(GLP-1RA) 등의 인크레틴 제제는 대규모 임상 연구(CVOT)를 통해 그 임상적 가치를 입증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지침에서는 죽상경화성 심혈관질환(ASCVD)이나 만성 신부전, 뇌졸중 등을 동반한 2형 당뇨병 환자에게 당화혈색소 수치나 메트포르민 투여 여부와 관계없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병용 처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약제 자체의 '계열 효능(Class Effect)'을 인정해 의사가 환자의 상태에 따라 가장 적합한 약제를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것이다.
반면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고수하고 있는 국내 급여 기준인 '당뇨병용제 일반원칙'은 철저히 낡은 행정적 기준에 갇혀 있다. 현행 고시상 GLP-1RA 계열을 급여로 처방하려면 반드시 메트포르민과 설포니레아(SU)제제를 먼저 사용하고도 실패했다는 기록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 같은 기준이 확립된 것은 20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대 초반 고가의 신약이었던 '아반디아(로시글리타존)' 등이 국내 도입될 당시,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 방어를 목적으로 의학적 타당성보다는 '가장 저렴한 구형 약제 조합(SU+메트포르민) 실패 후 신약 허용'이라는 계단식 규제 틀을 짰다.
이후 당뇨병 치료 패러다임이 '합병증 예방'으로 완전히 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건당국은 15년 전 해묵은 가이드라인의 틀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임상 현장에서는 저혈당 위험과 체중 증가 부작용이 뚜렷한 SU 제제를 환자에게 먼저 먹여보고, 몸이 망가진 후에야 체중을 줄이고 합병증을 막아주는 최신 GLP-1RA 계열을 처방할 수 있는 구조적 모순이 강제되고 있다.

오젬픽, 무늬만 급여에 의사들은 '삭감 공포'
최근 임상 현장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인 '오젬픽(세마글루티드, 노보노디스크제약)'의 건강보험 급여 적용 역시 기형적인 규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국내 급여권에 진입했으나, 보건당국이 설정한 세부 고시가 빡빡해 '생색내기용 급여'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오젬픽의 현행 급여 기준을 살펴보면 일반원칙에 따른 제한에 더해, 메트포르민과 SU 혹은 기저인슐린과의 3제 요법 조건은 물론, 심혈관 질환 동반 여부 등에 따른 별도의 세부 개별 고시 조항을 촘촘하게 설정했다.
임상현장에서는 급여 등재 이후 지역별 심사당국 조차 급여 유권해석을 다르게 내릴 만큼 복잡한 조항 탓에 의사들은 극심한 위축을 호소하고 있다. 아무리 의학적 근거에 비춰 오젬픽 처방이 시급한 환자라 할지라도, 추후 심평원으로부터 '무더기 삭감'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에 맞춰 처방전을 발행하고도 행정적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의사들이 처방 자체를 주저하는 기현상이 진료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A대학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오젬픽이 어렵게 급여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임상 의사들 사이에서는 조금이라도 고시 기준에서 어긋나면 심평원으로부터 삭감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며 "개인적으로도 아직까지 처방해보지 못했다. 기준 확립이 모호한 상태에서 삭감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처방을 주저하고 기존 구형 약제 조합에 머무는 쪽을 택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까다로운 규제 위주의 약가 정책은 최근 글로벌 제약사의 최신 약제들이 한국 시장을 기피하거나 철수하게 만드는 부작용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 건강보험 약가 제도는 신약이 급여권에 진입할 때 대폭 깎인 가격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이후 사용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사용량-약가 연동제'에 의해 자동으로 가격이 추가 인하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 입장에서는 한국 시장에서 약가가 지나치게 낮게 책정될 경우, 전 세계 신약 약가 협상의 '기준점(가이드라인)'이 하향 조정되는 리스크를 안게 된다.
결국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거나 글로벌 약가 통제권을 잃게 되는 기형적 환경 탓에, 한국 환자들은 글로벌 스탠다드 신약을 가장 늦게 접하거나 치료 기회를 박탈당하는 악순환에 직면해 있다.

중증 합병증 대란 예방이 진정한 건보 재정 절감
다행히 정부도 이 같은 임상 현장의 요구와 글로벌 임상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지하고 최근 제도 개선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복지부와 심평원은 당뇨병학회 등의 의견을 바탕으로 기저질환을 고려한 당뇨병용제 일반원칙의 전반적인 개편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심평원을 중심으로 약제 조합 확대가 건강보험 재정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재정 영향 평가'도 함께 진행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심평원 관계자는 "당뇨병 기준 개정은 현재 검토 중에 있으며, 학회에서 요구하는 내용들이 담길 수 있도록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임상 현장에서 보기에 부족했었던 부분이 있었던 만큼,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찾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개정안 확정까지는 약제 조합 확대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 소요 예측이 최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이 관계자는 "당뇨병 약제는 워낙 재정 파이가 크다 보니 단기간에 예측이 끝나지 않아 현재 재정 영향 분석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며 "오젬픽 관련 고시 개정 안건이 접수돼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