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의 투사-중도 낙마-구속-면허취소 '영욕의 세월'
2000년 의약분업 투쟁을 이끈 김재정 대한의사협회장에 대해 면허취소 처분을 내렸다고 복지부가 4일 밝혔다. 이미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면허취소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 복지부가 정식으로 행정처분서를 당사자에게 발송함으로써 면허 취소가 눈앞에 닥쳤다. 복지부 행정처분서에 따르면 김 회장은 내달 10일 면허가 취소된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7년간의 족적을 더듬어 본다.의약분업 반대투쟁의 선두에 서다
의약분업 공방이 막바지로 치닫던 1999년 당시 김재정 서울시의사회장, 의협 의약분업비상대책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의료계의 의약분업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같은해 11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올바른의약분업쟁취를 위한 궐기대회'는 김재정이란 인물의 진가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서울시의사회원 2000여명을 대거 동원 집회를 주도했다.
이 집회를 계기로 김 회장은 의쟁투을 결성하며 투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해 12월 대정부 투쟁기구인 의권수호 투쟁위원회를 서울시의사회에 설치한 것. 이후 의쟁투는 의협 특별기구로 자리매김하면서 여의도집회와 집단 휴폐업을 주도하며 3기 신상진 위원장까지 이어진다.
12월7일 의약분업 시행의 근거를 담은 약사법 개정안이 결국 국회를 통과했고 이듬해 1월8일 의협 대의원총회는 참석대의원 285명중 215명의 찬성을 얻어 의약분업안에 합의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유성희 의협회장의 사퇴서를 수리한다.
의협은 이 때부터 4월 정기대의원총회까지 김두원 부회장의 회장직무대행 과도 체제로 운영된다. 김 회장도 의약분업 합의에 따른 책임을 지고 사퇴서를 제출했지만 서울시의사회 임시대의원총회는 재신임을 결정하며 그에게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
2월17일 의협은 의쟁투 주도로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올바른 의약분업 실현을 위한 궐기대회를 열고 동네의원을 대상으로 1차 파업을 단행했다. 의사회 사상 처음으로 단행된 이 집회에서 김 위원장은 윤민경 회원과 함께 삭발을 단행한다.
9일간의 단식...김대중 대통령 면담
2000년 3월20일 김재정 의쟁투 위원장은 조정제, 한상학 의쟁투위원과 함께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30일로 예정된 동네의원의 집단휴진을 열흘 앞둔 시점이었다. 단식은 김대중 대통령 면담 직전까지 9일간 진행됐다.
3월29일 오후 5시의료계 대표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의사들의 진료권 확보를 위한 정부의 확고한 방침을 약속했고, 김 위원장은 집단휴진 철회 계획을 시사했다.
의협은 이에 따라 30일 의쟁투 중앙위원회의 휴진철회 추인을 받아 시도의사회장 회의를 통해 집단휴진 계획을 무효화 했다.
그러나 집단 휴진 철회는 젊은 의쟁투 위원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샀다. 이들은 4월2일 의협에서 중앙위원회를 새로 구성하고 바로 회의를 열어 4일부터 3일간 전면 휴진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결국 김위원장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서를 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의쟁투 중앙위원들의 재신임을 받아 제2기 의쟁투를 결정하게 된다. 김 위원장은 4월22일 의협 정기총회에서 의협 회장에 당선되면서 의쟁투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3차 파업...구속
김재정 신임 의협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의약분업 저지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한다. 6월3일 의협은 과천정부청사 잔디마당에서 회원 3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잘못된 의약분업 저지를 위한 전국 의사 투쟁결의대회를 갖는다.
이 자리에서 의협은 7월부터 시행되는 의약분업을 저지하기로 결의하고 정부가 의사들의 요구사항인 전문의약품 확대, 진료수가 인상, 의료보험재정 국가지원 확대 등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6월 20일부터 집단 폐업을 하기로 선포했다.
결국 정부의 대답은 없었고 의협은 6월 20일부터 25일까지 3차 파업을 단행하고 검찰에 구속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검찰은 7월 4일 의료계 집단폐업을 주도(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과 의료법 위반, 형법상 업무방해 혐의)한 혐의로 김 회장을 구속수감하고 신상진 의쟁투 위원장, 사승언 의쟁투 대변인겸 운영 위원, 배창환.박현승 의쟁투 운영위원 등 의료계 지도부 4명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회장 등에게는 일선 병. 의원에 폐업을 사실상 지시하고, 전공의들에게 폐업참여를 유도, 종합병원의 업무 방해, 자기 병원에 내려진 업무개시 명령 위반 혐의가 적용됐고 이것은 6년 후 김 회장과 한광수 전 회장의 의사면허 취소로 이어진다.
"회장직 사퇴...그리고 복귀"
2000년 8월1일 의료계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의약분업이 전면 실시된다. 의료계는 이에 따라 11일부터 17일까지 4차 파업을 단행한다.
의료계의 파업이 진정기미를 보이고 있는 18일 김재정 회장은 보석으로 석방됐다. 재판부는 "김 회장을 풀어주면 의료계 폐업사태 해결의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보석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8월 30일에는 서울시의사회 한광수 회장(전 대한의사협회 회장 직무대행)과 최덕종 의권쟁취투쟁위원장 직무대리가 보증금 2천만원에 풀려났다. 이들은 석방 직후 보라매공원에서 열리고 있던 '국민건강권 수호를 위한 의사 학생 대동 한마당 및 의료개혁 원년선포식에 참석한다.
8월31일에는 의약분업 관련 대정부 요구안이 발표되고 9월5일에는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의 의대 교수들이 외래진료 철수를 단행했다. 또 10월6일부터 10일까지 의료계 5차 파업이 진행됐다.
2001년 6월14일 김재정 회장이 사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임기를 1년 10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회원 내부결속과 더욱 강력한 투쟁기구 가동을 위해 사퇴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러나 김 회장이 사퇴하게된 실질적인 이유는 7월1일부터 시행 예정이던 정부의 보험재정 안정대책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회원들의 비판에 따른 것이었다. 집단파업을 강행하자는 회원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3일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열린 전국의사결의대회에서 일부 강경파 회원들이 집행부를 성토하며 단상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 의협은 한광수 서울시회장을 회장대행으로 선출해 대행체제에 돌입 직선제 정관개정 등 논의에 들어갔다. 이어 10월 21일 의사협회 사상 처음으로 직선제로 실시된 회장선거에서 신상진 의쟁투 위원장이 당선됐다.
2003년 3월 의사협회 회장 선거에서 김재정 후보는 신상진 회장 등 5명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김 후보는 유효 투표수 1만4353표중 5878표를 얻어 신상진(2851표), 최덕종 후보(2339표)를 눌렀다.
언론들은 그의 당선을 "의료게 투사가 돌아왔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7년간의 투쟁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김 회장은 의사들에게 너무나 선명한 투사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의쟁투 위원장으로, 또 대한의사협회 회장으로 고발과 구속을 무릅쓰고 의권쟁취 투쟁을 이끌었던 이미지다.
비록 지난 7년간의 의권투쟁이 의료계 안팎으로 많은 변화와 부작용을 낳기는 했지만, 사상 처음으로 의사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줌으로써 의사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던가. 이 과정에서 그는 의쟁투 위원장과 의협회장직에서 각각 중도 사퇴한 불명예도 함께 기록했다.
회무에 있어서 김 회장은 장영각씨의 거액 횡령사건으로 곤혹을 치렀고 뒤늦은 대처로 약대6년제 저지에 실패하는 오점을 남겼다. 이 때문에 회원들로부터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하는 무능한 집행부라는 날선 비판앞에 서야만 했다.
김재정 회장의 3년 임기가 마침내 끝이 난다. 의약분업 사태 이후 의료계 투쟁의 선두에 서서 영욕의 세월을 보낸지 7년만이다. 지난 공과를 떠나서 그는 의료계를 위해 싸웠고, 그 댓가로 의사로서 생명이나 다름없는 면허를 빼앗길 위기에 놓였다. 5월 10일이면 그는 더이상 의사 신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