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요청 묵살한 채 진료비환수 관행화 "이젠 지친다"
|긴급진단=원외처방약제비 환수|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는 지난 23일 과잉원외처방약제비 환수를 담은 건강보험법 개정안을 수정의결하면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가 과잉원외처방약제비 환수법안 상임위 의결을 6월 이후로 연기하면서 정부와 의료계간 극단적인 갈등을 잠시 피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법안을 둘러싼 찬반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메디칼타임즈는 원외처방약제비 환수의 근거가 되는 요양급여기준이 합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긴급점검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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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도개선 찔끔찔끔, 속타는 의료기관
(하)급여인정 '바늘구멍'…정부 의지 의문
요양급여기준을 초과하지만 의학적 타당성이 인정되고 진료를 위해 불가피하면 보건복지가족부령이 정하는 방안에 따라 요양급여 또는 비급여로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겠다는 것이다.
의학적 타당성이 인정되는 진료를 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지난 3월 20일 보건복지가족부는 요양급여 적용기준 및 방법 세부사항을 개정 고시했다.
개정 고시 중 하나가 항생제 일반원칙이다. ‘환자의 병력이나 과거의 약제 투여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고단위 항생제를 무차별로 투여하는 경우 요양급여를 인정하지 아니함’ 항목을 삭제한 것이다.
복지부는 “항생제를 사용할 때 오해 소지가 있는 일부 문구를 수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A대학병원 관계자는 “일부 요양급여기준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면서 “특히 항생제는 기준을 모호하기 때문에 심평원이 삭감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삭감할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급여기준 개선 요구 미적미적…병원만 골탕
그렇다면 병원계는 언제부터 이런 항생제 일반원칙을 개정할 것을 요구한 것일까?
이 관계자는 “2000년 초부터 여러 대학병원들이 요양급여기준을 명확하게 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지만 번번이 묵살당했고, 기준이 애매하다보니 삭감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면역억제제인 ‘사이폴엔’도 지난 24일부터 일부 허가사항을 초과해 투여할 수 있도록 요양급여기준이 개정됐지만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성모병원을 포함한 대학병원들은 과거부터 ‘사이폴엔’을 불가피하게 허가사항 범위를 초과해 혈구탐식증 혹은 조직구증에 투여해 왔다.
물론 허가사항을 초과한 만큼 환자가 약값 전액을 부담했지만 이는 명백히 임의비급여에 해당되며, 환자가 민원을 제기하면 약값을 환급해줘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대학병원들은 수년 전부터 혈구탐식증 혹은 조직구증에도 ‘사이폴엔’을 투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의학계는 이 약제가 혈구탐식증에 효과가 있는 치료제라고 언급한 세계 Histocyte society의 HLH2004 가이드라인을 임상적 근거로 제시했지만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성모병원은 2006년 12월 보건복지가족부 실사에서 임의비급여 항목 가운데 하나로 ‘사이폴엔’이 적발돼 169억원에 달하는 환수 및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황당한 것은 복지부가 성모병원 임의비급여 사태후 뒤늦게 의학계의 요구를 수용, ‘사이폴엔’에 대한 요양급여기준을 개정하면서 ‘HLH2004 가이드라인’을 임상적 근거로 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이폴엔’ 급여범위를 확대해 달라는 의학계의 요구가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부가 묵살하자 병원들은 불가피하게 임의비급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돌아온 것은 부당청구기관이라는 낙인이었다.
이처럼 복지부가 요양급여기준을 개선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했다는 게 병원계의 혹평이다.
하지만 복지부는 서울서부지방법원이 2008년 9월 서울대병원과 이원석 원장이 제기한 원외처방약제비 환수액 반환소송 1심에서 이들 의료기관 손을 들어주고, 대학병원들이 대거 소송에 가세하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외처방약제비를 과잉처방한 의료기관으로부터 해당 비용을 환수할 수 있는 근거를 건강보험법에 명시하기 위해 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지만 국회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법 개정시 의사들의 진료권을 침해할 수 있고, 요양급여기준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삭감하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라며 급여기준 개선을 주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복지부는 어쩔 수 없이 ‘약제 급여기준 개선 태스크포스’를 만들었고, 의료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시작했다.
"생생내기용 행정 이젠 지친다"
그렇지만 이를 바라보는 의료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C대학병원 관계자는 “건강보험법을 개정하기 위한 생생내기용 행정에 불과하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못 박았다.
그는 “진료비가 삭감되면 이의신청도 내고, 요양급여기준 개선 요청도 하지만 100개 중 99개를 기각하고 선심 쓰듯 찔끔찔끔 개선해 주는 게 복지부의 행태”라면서 “그러다보니 급여기준을 개선해도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고 질타했다.
요양급여기준이 개선된다고 해서 반길 상황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성모병원 모교수는 “정부는 이런 급여기준 개선 사례를 나열하면서 합당한 의학적 근거가 있으면 모두 급여로 전환해 주는데 의료계가 제도 개선 노력을 하지 않고 불법처방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할 게 뻔하다”고 우려했다.
D대학병원 관계자는 “의료기관이 아무런 의학적 근거도 없이 마음대로 약을 처방하는 게 절대 아니지 않느냐”면서 “식약청 허가사항 범위에 해당하지만 급여기준을 초과하면 비급여를 인정해야지 이런 식으로 환수하고 매도하는 것에 대해 이젠 지친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요양급여기준에 문제가 있으면 정부가 신속히 개선해 줘야 하는데 검토중이란 소리만 되풀이한다”면서 “그러는 사이 진료비 민원이 쏟아지고 환수당하는 게 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그는 “이런 상황에서 원외처방약제비 환수가 정당화되면 의료기관은 자선단체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