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장
코로나19로 어수선한 중에도 임인년 새해가 밝았다. 해는 매일매일 뜨고 지며, 날은 매일매일 같은 날들이 반복되지만 우리는 한 주일, 한 달, 일 년을 나누어 매듭을 짓는다. 선조들의 지혜 덕분에 우리는 시간개념을 가지고 이처럼 정리하는 습관을 지니게 된 점에 감사드린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지난해는 어떻게 보냈는지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뛰어왔나 하고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뇌리를 스치는 일들이 떠오른다.
우선 생리학자로서 전공하는 분야에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나온 것이 참 반가웠다. 내가 하는 일이 그래도 의미가 있는 일이구나 하는 안도감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초의학을 전공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이 다소나마 해소되는 사건이었다.
지난해에는 유독 의사과학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해였다. 코로나19 사태로 백신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우리나라의 연구역량이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한 것 때문일까? 기초의학 교수로서 사회로부터 이처럼 많은 관심을 받으니 어깨가 무거워진다. 아무튼 사회에서는 의사과학자를 필요로 하는데 의사과학자에 대한 문제는 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이 불완전한 의학을 완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초연구에 지원하지 않는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데 있다.
필자가 졸업할 당시는 5% 정도가 기초의학을 지원했는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찾아보기가 어렵다. 기초의학계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지속해서 제기하였으나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선진국의 사례에서 의사들의 연구에 대한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고 입증이 되었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의대생들을 위한 연구중심 교과과정을 신설하고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지식(knowledge)은 경험(experience)으로부터 나오고 경험은 지혜(wisdom)를 생산한다'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말처럼 경험은 새로운 것을 체득하는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체득(embodiment)한다는 것은 직접 경험해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내재화(internalization) 혹은 내적동기부여(intrinsic motivation)라는 기전이 작동하는데 이는 자기주도적 학습(self-directed learning)을 통해 가장 강하게 작동하므로 스스로 좋아서 경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일찌감치 공자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며 자기주도적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의대생의 연구 경험을 위해 정부가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정부의 의사과학자 양성정책은 의대생부터 전문의까지 모든 계층에 걸쳐서 열려있다. 이제 의사들이 '배우고 경험하려는 용기'를 낼 차례이다.
강해진 사회의 요구, '좋은의사'란?
다음으로 지속적으로 사회적 화두에 오르는 것은 '좋은 의사'이다. 지난 5년간 우리나라 40개 의과대학이 회원인 협회를 맡아 오다 보니 의과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할 때가 많았다. 공공의료 문제도 그렇지만 좋은 의사를 원하는 사회의 요구는 매우 강하다.
특히 벌써 재작년이 되었지만, 의정 갈등을 겪으면서 사회에서 의과대학에 요구하는 것이 좋은 의사를 만들어 달라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의사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많은 문제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결과는 여전히 우리의 문제로 돌아온다. 또한 언론 기사의 댓글을 읽으면서(물론 댓글이 일부의 생각이 표출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태로 과연 의사가 사회의 리더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도 많이 들었다.
사회가 지속해서 변화하면서 의료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요구가 생겼는데 우리는 진료실에서 찾아오는 환자들만 대하다 보니 질병은 잘 치료하지만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환자는 잘 치료하고 있는 걸까? 사회와의 관계에 대하여는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깊어진다. 우리는 왜 의사가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데까지 이르면 답답해진다.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은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의료의 문제를 이제는 의료계가 먼저 해법을 제시하고 사회를 이끄는 것이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정부와 사회는 의료 불균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특히 의사들의 도시농촌 간 격차가 큰 것을 주된 문제로 생각한다.
이러한 의사 인력 분포의 불균형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며 전 세계적인 고민 사항이다. 이에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전문가 연구를 통해 해결책을 마련하여 우선 지역에서 동기가 부여된 의대생을 선발하고 지역의료에 관한 내용을 교육과정에 넣을 것을 권고하였는데 여기에도 자기주도적 학습을 통한 경험에 큰 의미를 두고 그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결국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체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으며 강제 근무를 조건으로 한 공공의대와 같은 정책은 근무환경이 개선되어 근무하고 싶은 환경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바람직한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하여 조건부 권고사항으로 채택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강제로 움직일 수 없기에 보다 섬세한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뿌리 깊은 유교 사상으로 인해 여성들이 현대의학을 전공한 남자 의사의 진료를 꺼렸던 시대에 여성 환자를 진료할 여성 의사 양성이 필요하다며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만든 로제타홀 선교사처럼 사회의 요구를 인지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개척자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때라 생각한다.
따라서 의료계가 먼저 개척자 정신으로 지역사회에 발생하는 의료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최근 제3의 의학의 축이라 알려진 의료시스템과학(Health Systems Science, HSS) 즉 의사의 사회적 책무성을 강화하는 교과과정을 의과대학 교육과정 중에 넣어서 교육하고 체득하게 한다면 동기가 유발된 의사들이 양성될 것이며 이들을 정부와 사회 모두가 응원하고 기다려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와 함께하는 의사를 좋은 의사라 부를 것이다.
의사과학자이든 좋은 의사이든 간에 현재 사회에서 의료계에 요구하는 사항을 앞서서 인지하고 국민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의료계가 한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한목소리가 되어 의료계가 가야 할 길에 대하여 방향을 정하고 원칙과 명분을 꿋꿋이 지키며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의사가 환자를 위하여 앞장서서 가는 길에 대하여는 사회도 큰 응원을 보낼 것이라 믿는다.
국민의 건강과 관련된 사항은 사회가 요구하기 전에 전문가인 의료계가 먼저 파악하고 적극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앞장설 때 정부와 사회는 의료계를 신뢰하고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척자 정신을 통한 의료계의 변화에 젊은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임인년 새해에는 의료계가 한목소리가 되어 국민을 건강하게 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정부 그리고 사회와 함께 계속 전진할 수 있는 희망찬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