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상]응급의료체계가 무너진다…의료소송 리스크 피해 떠난다
"소아응급 진료 무서워, 차라리 개원 택해" 의료진 이탈 확산 조짐
#1. A대학병원 A소아응급 교수는 인근 초등학교 화재 발생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다. 심각한 화상환자가 올 것을 대비해 어렵게 병동을 마련해 뒀지만 예상밖으로 응급콜도 없이 조용했다. 하지만 119 구급대원은 병원 측이 응급환자 심폐소생술(CPR)을 거부했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욕까지 먹어가며 병상까지 마련하고 기다렸던 A교수는 진지하게 '사직'을 떠올렸다.
#2. B대학병원 B소아응급 교수는 최근 의과대학 전임교원 발령을 받았지만 사직을 결정했다. 밀려드는 환자에 업무부하 강도가 계속 높아지는 반면 치료를 했을 때 보람은 커녕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의료분쟁의 굴레에서 더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C원장은 얼마 전까지 대학병원 교수 직함을 달고 환자를 진료했지만 최근 개원을 택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원인은 '소송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C원장 동료들은 단톡방에서 "소아환자는 진료를 안 하는 게 상책"이라며 하소연을 하고 있다.
대구에 이어 서울권까지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건으로 논란이 확산되면서 일선 소아응급 의료진들의 이탈 현실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앞선 사례는 현재 소아응급 의료현장을 지키고 있는 의료진들의 하소연으로 현재 소아응급 전문의들 사이에서는 사명감만으로 버티기에는 직업적 안정감이 크게 추락했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지난 3월 터진 대구 10대 환자 응급실 뺑뺑이에 이달(5월) 서울권에서 응급실 뺑뺑이 논란에 휘말린 사건이 발생하면서 소아응급의료체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응급의학과는 불과 3~4년전만해도 젊은의사들 사이에서 '인기과'로 등극할 조짐을 보였다는 점이다. 지난 몇 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아응급 전문의들이 이구동성으로 짚는 소아응급의료 체계 붕괴 수순은 이렇다.
최근 몇 년 간 소아응급 관련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 결국 모든 책임은 진료를 한 의료진에게 있는 것으로 귀결되면서 기피현상이 나타났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개원가 경영난이 현실화되면서 전공의 기피현상이 급격히 진행됐다.
또 코로나19 당시 소청과 환자 급감과 향후 저출산을 고려해 일선 대학병원들도 의료진을 줄인 상태. 문제는 일상회복으로 최근 다양한 감염질환으로 소아환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니 곳곳에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수도권 대학병원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소청과 의료진 줄였다. 이후 소아환자 늘면서 구멍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소아환자는 입원치료가 중요한데 이를 감당할 의료진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에 덧붙여 소아응급 현장을 지키는 의료진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사건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결심이 굳어지고 있다. 지난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부터 이비인후과 한 의사가 전공의 시절 응급실 근무 중 의료소송에 휘말려 수년 간 시달린 사례까지 계속해서 터지면서 '진료 위축'을 넘어 '이탈'로 번지고 있다.
수도권 내 대학병원은 소아응급 전문의 2명이 지역 거점역할을 해왔지만 2명 모두 사직하면서 당장 소아응급 진료에 공백이 생겼다. 이를 두고 한 젊은의사는 "응급의학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소아응급은 그만두는 게 답 이라고들 한다"고 전했다.
특히 지난 3월에 이어 5월 벌어진 소아환자 응급실 뺑뺑이 사건을 계기로 또 한번 소아응급 의료진의 이탈 러시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소아환자 특성상 보호자 민원도 의료진들에겐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 드러나지 않는 이탈의 원인 중 하나다. 대학병원 소아응급 교수는 "소아환자 진료는 보람되고 좋지만…보호자를 설득하고 설명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다"라며 "특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료소송 빈도가 높아진 것도 소아응급 진료를 꺼리는 요인"이라고 했다.
지방의료원에 한 응급의학과장은 "개인적으로 나부터도 소청과 전문의가 없어 백업이 되는 상태에서 소아응급환자를 진료했다가 자칫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생각에 방어적으로 진료를 하게 될 것 같다"며 "이번에 발생한 서울권 응급실 뺑뺑이 사건 이후 파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응급의학과 개원 붐도 소아응급 의료진 이탈에 한몫하고 있다. 과거 응급의학과는 병원 응급실 근무로 인식했지만 최근 365의원으로 개원하는 사례가 늘면서 응급의학과 전문의들도 '개원'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단순히 금전적인 측면 보다는 '당직' 등 업무로딩과 더불어 의료소송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수도권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금이라도 개원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며 "매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적어도 의원급에선 대학병원 대비 경증환자 위주의 진료로 의료분쟁을 겪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A지방의료원 응급의학과장은 "급여가 높아도 의료분쟁에 한번 휘말리면 3억~4억이 날아가는데 어떤 의사가 리스크를 떠안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일선 아동병원장은 "지난해 소청과 전공의 기피현상과 동시에 병원급에서 소아병동에 의사, 간호사 인력난이 극심해졌다. 인건비도 30~40%인상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기존 병동 2개에서 1개로 줄였다"라며 "이 같은 변화가 결국 소아환자 진료 공백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부터다. 일명 '응급환자 수용 의무화법(응급의료법 개정안)'이 조만간 법제처 심사를 거쳐 공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해당 법은 119구급대는 응급환자 이송시 환자 수용역량을 반드시 확인해야 하고, 해당 의료기관은 정당한 사유없이 거부 또는 기피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응급의료 거부시 징역 3년이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담아 입법예고했지만 의료계 반발로 규제심사를 진행 중이다.
복지부가 입법예고한 수용곤란 고지 기준(안)'을 보면 '격리병상이 필요한 환자의 경우 격리병상이 없을 경우' '응급수술이 필요한 환자의 경우 수술실이 없는 경우' '사고 등으로 응급실이 기능할 수 없는 경우' 등이 담겼다. 특히 중증응급환자의 경우 중환자실과 입원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용곤란을 고지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벌써부터 응급실 현장의 의사들 사이에선 해당 법이 현실화되면 사직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는 얘기가 새어 나온다. 일각에선 "지옥문이 열린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위 사례의 A교수는 "내가 사직하면 남은 동료들의 업무로딩이 높아지는 게 미안해서 버티고 있는 실정"이라며 "지금도 의료진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와 더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며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소아응급 한 교수는 "지금까지는 응급실에서 소아응급을 함께 하는 분위기였지만 앞으로는 소아진료 업무를 맡기면 사직을 택하는 의료진이 늘어 결국 소아응급환자를 치료할 의료진은 씨가 마를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이 내놨다.
복지부 응급의학과 김은영 과장은 "응급환자 거부에 대한 정당한 사유를 어떻게 통보할 것인지 등은 복지부령으로 규정해둔 상태로 현재 규개위 심사 중"이라며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야 의료현장에 적용하는 것으로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