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라운지] 소아청소년과학회 이기형 회장(고대안암병원)
"선진국 진입 위한 진통…과거 돌아가도 전공 다시 선택"
소아청소년과가 위기에 직면했다. 저출산과 저수가, 낮은 전공의 지원율이라는 '삼중고'는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는 지표와 같다는 게 내외부의 평가. 의-정 갈등으로 인한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까지 겹쳤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머지않아 밝은 미래가 반드시 다시 온다는 것이 제 63대 소아청소년과학회 이기형 회장(고대안암병원 소청과)의 확고한 신념이다. 그가 내년 2월을 끝으로 정년을 맞는다. 1989년 전문의 취득 이후 35년간 소청과 전문의로서 살아온 그의 삶은 후배 세대들에게 어떤 통찰을 줄까.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각색했다.
존경하는 미래의 소아청소년과 후배 여러분께,
처음 진료실 문을 열고 첫 환아의 얼굴을 마주한 그날을 기억합니다. 아직도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갓 걸음마를 배우던 아기들이 벌써 장성한 어른이 돼 자신들의 자녀를 맡기는 모습을 보며 때론 가슴이 벅찼고, 때론 세월의 빠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35년 소청과 의사 생활은 참으로 특별한 순간들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냉혹하리만큼 차갑습니다. 전공의 지원율은 해마다 하락해 2024년 상반기 전공의 지원율은 불과 25.9%에 머물고 있으며, 환아들은 줄어들고, 저수가 문제는 여전합니다. 학회장으로 취임할 때만 해도 지난 9월 정부의 소아 입원진료와 야간, 휴일 소아진료 보상강화를 골자로 한 소아의료체계 개선책을 곱씹으며 미흡하나마 이제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가졌지만 급작스런 의-정 갈등이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야 할까?"라는 질문을, "과연 소청과 의사로서의 미래는 있는 걸까?"라는 불안감을 품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여러분과 같은 고민을 안고 시작한 35년 전의 제가 기억납니다.
당시 소청과는 경쟁이 치열했지만 결코 찬란한 미래를 기대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고 중병을 고치는 메이저과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청과) 중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동기가 소청과 선택으로 이끌었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자부심이 고된 하루를 견디게 했습니다.
당시엔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고대 구로병원 소청과에서 근무하던 시절 하루 당직 시 입원 환자만 10명이 넘었고 소아의 영양 상태가 떨어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중환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새벽에 응급 콜을 받고 달려가야 했던 날들, 수없이 오가는 회진과 야간 당직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습니다.
그럴 때면 "이 길이 맞나?"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속도가 붙은 변화의 속도 역시 불안감을 키웠습니다. MRI 등의 신기술이 보급되면서 영상의학과 등 새로운 과가 주목받고 발전했지만 소청과는 클래식한 과로 인기가 하락하고 있었고, 출산율 저하의 조짐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저출산 상황에서 소청과의 위기는 예정된 일이라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선배로서 현재의 위기에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안주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진료 영역을 개발하고 확장하는 노력이 못내 아쉽습니다. 환아가 줄어든만큼 진료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먼저 이끌어냈더라면 출산율 반등의 계기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쉬움이 '소아청소년 건강권 보장을 위한 기본법' 추진의 배경이 됐습니다. 2023년 일본이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하는 '성육기본법'을 도입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변화가 따를 것으로 믿습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늘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으로 도약했던 나라들이 먼저 걸었던 그 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소청과에도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학회가 최근 전공의들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기회가 주어지면 소청과를 다시 선택하겠다"는 응답은 30%에 그쳤습니다. 교수들조차 45%만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만큼 소청과는 이제 메리트가 없다는 뜻이겠죠. "전문의만 따면 괜찮을 것이라고, 1~2년만 고생하자"고 견디던 시절도 과거의 일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청과 선배로서, 인생 선배로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청과를 다시 선택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아이들을 치료해서 건강한 성인으로 키운다는 것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숭고한 일입니다.
힘들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환자와 그 가족들의 감사 인사였습니다. 한 아이의 건강을 지켜냈다는 것이, 그리고 그 아이의 삶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돼 찾아와 "선생님 덕분에 건강하게 잘 컸어요"라고 말해 줄 때면 모든 어려움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출산율은 꾸준히 떨어졌고, 의료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저를 붙잡아 주었던 건 바로 진료실에서 마주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아프던 아이가 이제는 청년이 돼 대견한 모습으로 웃는 순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단해도 이 길을 선택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진료가 그 아이의 삶에 도움이 됐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만족감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험난해 보이겠지만 대한민국도 언젠가는 소청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건강한 다음 세대의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해 이 길을 포기한다면, 이 땅의 아이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현재의 어려움만을 바라보며 주저앉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이 길을 걸어온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다 같이 노력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시 시간을 돌려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저는 주저 없이 다시 소청과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 길에는 진정으로 따뜻하고 보람찬 경험들이 가득합니다. 세상을 밝히는 아이들의 미소와, 그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부디 이 편지가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소청과 의사로서의 소명을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갈 용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 소청과 의 미래를 책임지고, 우리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미안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