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늪에 빠진 한국 의료기관

발행날짜: 2024-11-11 05:00:00
  • 의약학술팀 이인복 기자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한번 더 확인 안했으면 어땠을지. 선적 들어간 후에는 저희가 책임져야 하잖아요. 병원은 못받는다 하고 기계는 오고 있고. 그 상황이 벌어졌으면 정말."

세계에서 손꼽히는 글로벌 의료기기 기업 임원의 말이다.

올해 초 그 기업은 국내 대학병원과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후속 작업에 들어갔다. 요청에 맞게 기기는 완성됐고 계약일에 맞춘 설치 준비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약속한 대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보통 관행적으로 의료기관들이 납기일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그러려니 했지만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차일피일 일정은 미뤄졌고 이 기업은 수차례 답변을 요구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몇 달이 지난 후 그 병원은 기기 도입이 어렵다는 답변을 내놨다. 말 그대로 일방적 계약 파기였다.

이는 비단 이 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또 다른 기업은 이미 들여놓은 기기에 대한 대금을 수개월째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기기 구매에 혜택을 제공하고 받기로 한 업무 협약도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기기값을 손해보더라도 한국의 리얼월드데이터를 받길 원했던 이 기업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약속에 속만 태우고 있다.

이유는 같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이른바 의료대란 때문이다. 실제로 의료 대란이 시작된 후 국내 대학병원들의 곳간은 이미 텅텅 비어버린지 오래다.

각 병원마다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고 구조조정 얘기를 넘어 지급불능, 도산 얘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이러한 상황에 어쩔 수 있느냐는 핑계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신뢰에 대한 부분에서는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러한 일방적 계약 파기, 약속 불이행에 대한 파장은 이미 불신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다.

일례로 한 글로벌 기업은 대학병원에 대한 판촉과 영업을 아예 중단했다. 수십억원에 달하는 의료기기를 납품하고 돈을 떼일 위험을 안느니 차라리 팔지 않겠다는 의지의 투영이다.

마찬가지로 각종 다국가 임상 패싱은 이미 만연화된지 오래다. 국내 대학병원에 임상을 맡겼다가 전체 일정이 틀어지느니 차라리 빼고 가겠다는 계산이 나온 셈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의료기관들은 3류 소비자로 전락했다. 돈을 떼이느니 안팔고 말고 일을 맡겨도 제대로 될지 미지수니 맡길 생각도 않는.

그동안 국내 의료기관들은 인플루언서로서 혜택을 누려왔다. 신약이나 새 모델을 먼저 런칭하는 사례도 흔했고 다양한 프로모션을 통해 가격적 혜택도 누렸다.

이는 곧 환자들에게도 혜택으로 돌아갔다. 가장 좋은 기기와 신약을 먼저 접할 수 있었고 이는 조기 진단, 최신 치료법을 저렴하게 적용받는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의료기관들이 이제 블랙컨슈머로 전락했다. 돈을 떼이느니 안팔고 말고 일을 맡겨도 제대로 될지 미지수니 맡길 생각도 않는 그런 3류 소비자 말이다. 불신은 늪과 같아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말 그대로 십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될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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