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본과 3학년 김채연(투비닥터 홍보팀)
이제는 당당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남한의 갑작스러운 비상계엄령에 전 세계가 술렁였다. 대통령의 충격적인 '정치적 자살 행위'에 외교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고 환율이 급등했다. 몇몇 국가는 즉시 대한민국을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시민 수준 역시 고평가받았다.
워싱턴 포스트(WP)는 "(비상계엄 선언은) 과거 어두웠던 시대로 시간을 되돌리려는 시도였으나, 한국은 이를 견뎌냈다. 민주주의는 온전할 뿐 아니라 강화됐다"며, "한 사람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시도보다 민주주의의 회복력이 더 강하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보도하였다.
아직 한국의 국가적 신뢰와 평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가 남았으나, 적어도 한데 뭉친 시민의 결집력이 가공할 만한 성과를 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 구심점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 속 개개인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게는 서로 다른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덤'부터, 크게는 정치 이념마저 완전히 다른 사람들까지.
평소에는 서로를 적대시하고 깎아내리기 바빴을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깃발과 전등을 들고 같은 공기 안에 모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들 역시 무척이나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말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놀라웠던 일 중 하나는 자유발언자들의 다수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수많은 소수자였다는 것이다. 이토록 지난한 혐오의 시대에 그들은 언제나 거리에서 혐오에 맞서 싸워 분연히 투쟁하고 있다.
언론도 사람도 조명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늘 피켓을 들고 차를 막히게 했던 사람들이 무겁고 명확한 실체를 입고 '집회 선배'로서 우리를 든든히 이끌어주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계엄령이 국민 전체를 위협했듯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삶을 위협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 그런 현장을 스치며 종종 생각했다. '힘들 텐데', '그렇게 해 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아니고 그들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위협받았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오로지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을 때 나도 그들처럼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짓밟힌 제 나라를 돌려주세요!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 외침은 보답받았다. 처음에는 요지부동으로 보이던 국회의원이 하나 둘 의견을 바꾸고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던 순간, 모든 국민이 한마음으로 함성을 질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외침이 물결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이 꿈 같은 깨달음을 모두 얻고 말았기 때문에.
그러니 이제는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만 했던 목소리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들의 목소리가 곧 내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4일 집회에서 어떤 성소수자 단체 대표가 이런 발언을 했다.
'계엄을 직접 막은 국회의원들은 중, 노년의 고학력 남성들이었지만, 국회의사당에 모여 소리 높여 그들과 함께한 시민들은 여성, 전장연 (전국장애인연합), 성소수자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소수자를 향했던 폭력이 이제는 국민 전체에게 온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원한다'
그 말처럼 사회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작은 응결핵이 불러 모은 물방울들이 거대한 구름이 되어 결국 공기를 밀어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개개인의 목소리는 자그마한 방울일지라도 꾸준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커다란 빛이 되어 닿을 것이다.
2024년 겨울의 서울은 빛으로 가득했다. 12월 3일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직후부터 12월 14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를 비롯해 수많은 도시의 수많은 길거리를 색색 가지의 촛불을 포함한 온갖 광원이 메웠다.
촛불과 횃불의 노란 빛뿐 아니라 온갖 아이돌 응원봉이 내뿜는 오색의 빛, 그리고 그 위에서 펄럭이는 여러 깃발들은 말 그대로 십인십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결같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은하수가 되어 우리 사회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