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 혁신, 정부와 현장의 간극

발행날짜: 2026-01-12 05:00:00
  • 의료산업1팀 이지현 기자

"요즘 업계에서는 임상 실패보다 약가가 더 무섭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제약업계 CEO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 기업 10곳 중 7곳은 '현행 약가 및 보상 체계가 신약 연구개발(R&D) 투자 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로 과학적 한계나 임상 실패보다 가격의 예측 불확실성을 꼽았다는 점에서 고민해봐야 한다.

정부는 신약과 혁신을 제약바이오 정책의 핵심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실거래가 연동 약가제, 가산 요건 개편, 사후 약가 인하 가능성 등 복합적인 제도 변화가 이어지면서 제약사들은 개발 리스크를 이전보다 훨씬 앞단에서 계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특히 임상 2상 이후부터는 과학적 성공 가능성 못지않게 '허가 이후 가격이 유지될 수 있을지'가 판단 기준이라는 말도 나온다.

한 중견 제약사 임원은 "연구가 실패할 확률은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약가는 설명할 근거가 없다"며 "이 불확실성이 투자 결정을 가장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는 제약업계 설문조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응답 기업의 절반 이상은 "향후 R&D 전략에서 신약 비중을 줄이거나, 최소한 개발 단계 진입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응답했다. 개발을 포기한다기보다, 실패를 감당할 여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변화는 제약사들의 사업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개량신약, 제네릭, CDMO 전환을 선언하는 기업이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현재 제도 환경에서 예측 가능한 수익 구조를 확보하겠다는 행보로 보인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신약을 안 하고 싶은 회사는 없다. 다만 지금은 끝까지 가도 남는 게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같은 행보는 당장은 외형상 혁신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고위험, 고부가가치 연구는 후순위가 되고 실패를 전제로 한 도전을 설 자리를 잃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혁신의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

혁신은 단순히 정부의 선언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기업이 실패를 견딜 수 있는 시간과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보상 구조가 함께 설계돼야 가능하다. 정부의 이상과 제약업계 현실의 간극을 메우지 않으면 제약산업의 향후 10년은 생각보다 조용히 지나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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