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철 대한이비인후과학회 부이사장
대한이비인후과의사회 전임회장

[메디칼타임즈=김병철 대한이비인후과학회 부이사장]대한민국 의료전달체계의 허리를 지탱하는 일차의료 강화라는 대의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 중인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시범사업(안)'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일선 현장의 특수성은 무시된 채 특정 진료과 중심의 모델을 모든 일차의료기관에 강제로 덧씌우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이비인후과가 마주한 진료 현장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비인후과는 '상담'만이 아닌 '처치와 술기'의 현장이다
이번 혁신안의 핵심은 기존 행위별 수가를 묶어 '월별 정액관리료'로 지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혈압, 당뇨와 같이 약 처방과 상담이 주를 이루는 내과적 만성질환 관리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매 순간 손기술을 동원한 처치가 이뤄지는 이비인후과적 진료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가 증상 악화로 내원했을 때, 이비인후과 의사는 단순히 약만 처방하지 않습니다. 비강 내 점막의 상태를 내시경으로 세밀히 관찰하고, 비강 세척이나 하비갑개 처치 등 즉각적인 술기를 통해 환자의 호흡을 개선합니다. 만약 화농성 중이염 환자라면 고막 절개나 이루 흡인같은 정교한 처치가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환자의 고통을 즉각적으로 경감시키는 핵심적인 의료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상담 관리료'라는 이름의 정액제 틀 안에 가두어버린다면, 복잡하고 정교한 처치를 수행할수록 의료진의 노동 가치는 저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국 현장에서 꼭 필요한 처치를 기피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여,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질환의 역동성을 무시한 'HCC 위험도 분류'의 허점
정부가 도입하려는 미국식 Medicare 위험보정 모델(HCC) 역시 이비인후과 진료의 역동성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비인후과를 찾는 환자들은 계절적 요인이나 급성 악화에 따라 진료의 강도가 급격히 변합니다.
단순 만성 질환자로 분류된 환자라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돌발성 난청이나 심한 어지럼증(이석증 등)이 발생하면 즉각적이고 집중적인 검사와 처치가 투입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급성기적 변화와 이비인후과 특유의 고난도 처치 수요를 '정액제 기반의 환자군 분류'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질환의 경중을 숫자로만 재단하는 방식은 현장의 복잡다단한 진료 양상을 결코 담아낼 수 없습니다.
주도권 없는 '거점 지원기관'과 행정 과부하의 늪
거점 지원기관(2차 병원 등)이 다학제 팀을 통해 일차의료를 지원한다는 발상 또한 주객이 전도될 우려가 큽니다. 이비인후과 질환은 장비 의존도가 높고 숙련된 전문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점 기관이 환자 관리의 주도권을 쥐고 의원을 '하부 조직'처럼 관리하려 든다면, 일차의료기관의 자율성은 고사하고 진료의 연속성마저 끊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야간·휴일 비대면 상담까지 강제화된다면, 가뜩이나 인력난과 행정 부담에 시달리는 소규모 의원들은 고사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특히 법적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의 비대면 상담은 의료진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독소 조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진정한 혁신은 현장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혁신은 현장의 동의와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멈추고 의료계와 진정성 있는 소통에 나서야 합니다.
1. 행위별 수가제(FFS)의 근간 사수: 상담과 관리뿐만 아니라 이비인후과 특유의 처치와 술기 가치가 별도로 보상받는 '혼합 지불제'가 명문화되어야 합니다.
2. 과정 중심의 평가 체계: 결과 수치 하나로 의사를 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위해 투입한 의료진의 노력과 과정을 인정해 주는 지표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3. 법적 안전망 구축: 야간 상담이나 재택 의료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해 의료진을 보호할 구체적인 법적 장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지역사회에서 국민의 귀, 코, 목 건강을 지키는 최전방 파수꾼입니다. 현장의 온기를 잃어버린, 차가운 수치 중심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진정으로 일차의료를 살리고자 한다면, 책상 위 데이터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땀 흘리는 의사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길 촉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