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亂世)와 치세(治世)의 처세술

전경수
발행날짜: 2003-08-07 02:08:05
얼마 전 한 의사분과 허름한 소주집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선생님의 말씀들 가운데 요즘 의료계의 답답한 상황을 가장 또렷하게 그려주는 말은 바로 ‘거대한 항공모함의 비유’였다.

여전히 의사들의 힘은 강하고 의사협회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하루에도 몇 건씩 터지는 동시다발적인 변화를 ‘거대한 항공모함'같은 의협이 하나하나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었다.

회원들은 무작정 의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기대를 하지만, 의료계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질수록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또 다른 작은 손발이 중요해 진다는 이야기였다.

돌아오는 길에 '왜 의료계에 이런 변화가 닥쳐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과거에도 개원의와 봉직의, 병원장과 전공의 등 다양한 의사들이 의협이란 한 단체에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입장차가 있다 해도 의협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 수렴되는 경우가 지금보다는 많았다.

그런데 의약분업이 시작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의료계의 갈등들이 단순한 의견차의 문제를 넘어서 생존의 문제로 변화해 갔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갈수록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 병원협회의 법정단체화나 전공의노조의 결성 움직임, 개원의협의회의 통합, 군소 의사회들의 약진 등은 바로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의협 안에서도 각자의 이해관계를 위해 서로 다른 의견을 뚜렷이 개진하고 이를 발빠르게 관철시켜 나가는 춘추전국의 난세(亂世)가 다가오는 모양새다.

분명 의료계에서 의사협회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으며 이 점은 앞으로도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난세(亂世)’와 ‘치세(治世)’의 처세술을 서로 달라야 한다.

'치세'에는 마치 유비와 같은 인자로움과 포용력이 힘을 발휘하지만 '난세'에는 조조처럼 이해관계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행동방식이 요구된다.

거대한 사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의료계가 의협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아래 모여 힘을 모으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사방에서 의료계를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변화들에 민감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 밑의 크고 작은 손길들이 중요해 진다.

의협도 이런 움직임을 단순히 힘의 분산으로만 백안시 할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나눠 드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위기는 기회를 동반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분명 최근 의료계는 잘못된 의약분업과 때마침 닥친 경제불황으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변화가 크다는 것은 그 안에 많은 기회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변화에 뒤쳐지지 않는 발 빠르고 민첩한 대응으로 의료계가 이 난국을 오히려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기회로 만들어 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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