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미래의 진료실 풍경

이동욱
발행날짜: 2007-08-31 10:53:29
  • 이동욱 대구시의사회 정책이사

때는 2012년 8월 중순 어느 날 오전 9시. 개원 7년차인 내과 P원장은 병원에 출근해서 진료실 컴퓨터를 켰다. 켜자마자 바탕화면의 메신저 창이 깜박거리면서 어제 진료한 환자 수가 일일 차등수가 적용대상인 40명을 넘어섰다는 경고가 들어왔다. 매년 3500명의 신규 의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전체 의사 수가 10만7000명에 육박하면서 개원 시장은 완전히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개원의사가 많아지면서 보험청구액도 늘어나고, 6년 전부터 시행된 입원 환자의 식대 보험급여로 보험재정 적자가 누적되면서 보건복지부는 차등수가 적용대상 인원을 일일 75명에서부터 매년 줄여서 개원의 1명당 일일 진료환자가 40명을 넘게 되면 아예 진료비를 받을 수 없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또한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여 과거 의료급여환자의 선택병원제도처럼 모든 환자들은 추가 비용없이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병원을 지정해서 진료를 받아야 되고, 환자들의 모든 진료내역은 공인인증서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험공단으로 전송되어 진료 승인번호를 받도록 하였다.

국가청렴위원회가 2007년도에 진료비 청구 투명성 제고를 위한 제도개선 방안으로 진료내역 통보제를 전 국민에게 확대할 것을 보건복지부에 권고한 이후로, 실시간으로 보험공단으로 전송된 진료내역은 다시 실시간으로 환자의 휴대폰이나 이메일로 전송되어 이제 더 이상 보험공단이 진료내역 확인을 위해 따라 애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제도로 인해 또 한 가지 달라진 것은 환자들이 다른 병원에서 받은 중복처방을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전 11시,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환자가 방문하였다. 제산제 처방을 내니 모니터 화면의 메신저가 깜박거린다.

요양기관의 중복처방 행태 개선과 의료재정 절감을 위해 2008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사전점검 시스템으로 요양기관에서 발생한 처방이나 조제내역이 사용금지나 중복처방에 해당될 경우 실시간으로 자동알람이 작동하게 되며, 의사가 경고를 무시하고 처방을 계속할 경우 해당 내역은 심평원을 통해 다시 해당기관과 환자에게 통지된다. 메신저를 눌러보니 환자가 2일전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내역 중에서 같은 성분의 제산제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환자에게 정신과 처방약을 드시라고 하니 환자는 '내가 정신과에 간 것까지 다 나오느냐'면서 화를 버럭 내고, 그냥 진료실을 나가버렸다.

P원장은 황당했지만 이런 경험이 자주 있다보니 신경 안 쓰기로 했다. 전에는 내원 환자가 좀 있어서 직원 4명을 데리고 그럭저럭 의원을 운영했었지만, 3년 전부터는 직원들을 다 내보내고 P원장 혼자서 10평 규모의 사무실을 얻어 책상과 의자만 놓고, 환자가 오면 처방전만 발행해주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공공의료 확충을 위해 5년전부터 4조3000억원을 투자하여 전국 보건소와 국립병원을 대상으로 공공의료서비스를 강화한 결과, 이제 국민들을 의원보다는 집 근처 도시지역 내 보건지소를 방문하여 저렴하게 진료를 받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예방 차원의 무료 검진 사업이 대형화된 전국 보건소와 건강보험공단 병원 등에서 활성화되다보니 P원장의 의원을 방문하는 내과 검진환자가 아예 없어 결국 개원할때 장만했던 내시경과 초음파 기계도 다 팔아버렸다. 그나마 좋은 점은 이제 더 이상 심평원에서 매분기별로 실시하는 의료장비 현황 조사에 응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어제 처방전을 받아갔던 고혈압 환자가 약을 먹으니 두통이 심하고 구역질이 난다면서 항의하러 내원하였다. 2007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시행되던 성분명 처방제도가 전체 의료기관으로 확대되면서, 이제 P원장은 환자가 복용한 약의 이름을 알기 위해 약국에 전화를 걸었다. 약사가 바쁜지 나중에 전화 주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럴 때마다 P원장은 의사들처럼 약국의 약사도 의사의 문의에 즉시 응대해주지 않으면 처벌받는 법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원장은 그 고혈압 환자로부터 부작용에 대한 항의를 듣다가 약물 생동성 실험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다보니, 결국 퇴근시간이 늦어져 저녁 약속시간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정부의 의료정책을 열심히 따랐던 P원장은 의원 문을 나서면서 갑자기 이 모든 상황들이 화가 나면서 왠지 의사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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