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5]
이슬람과 가톨릭 문명이 조우한 이베리아반도
몬세라트에서 발렌시아로 가는 길에 한적한 시골마을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무로 된 이집은 현관부터 분위기가 독특했다. 일층 카운터에는 하몽이 걸려있는 등 스페인 분위기를 물씬 나는 탓에 일행 중 몇 분은 카운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점심 메뉴는 샐러드를 곁들인 스페인식으로 구운 닭다리가 전부였지만, 크기로 보아 공장에서 키워낸 닭은 아닌 듯싶었다.
음식은 깔끔하고 맛이 있었다. 문 앞에 달아놓은 각종 우수 레스토랑 인증표시가 공연한 것은 아닌가보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서울에서 싸온 음식을 꺼내는 분도 있었는데 볶은 고추장, 멸치 볶음, 깻잎 장아찌 등 어찌나 다양한지 놀랐다. 준비된 여행은 역시 관록에서 나오는 것이다. 풋고추를 내놓은 분도 있었다. 그런데 농축수산물은 세관 신고대상품목이고, 문제가 되면 상당한 처벌을 받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정오 무렵에 몬세라트를 떠나 7시간 가까이 이동하여 발렌시아에서 쉬고, 다음날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그라나다까지 역시 7시간 가까이 버스로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유럽에서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 장거리버스의 운전자가 과로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LDC(Long Distance Couch)의 규정에 따르면 버스는 12시간 이상 운행할 수 없는데, 운전자는 그 가운데 9시간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으며 4시간 동안에 45분을 쉬어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운행을 마친 버스는 11시간 안에 운행을 재개할 수 없다고 한다.
심한 도로정체를 만나는 바람에 규정을 불과 3분 초과한 버스기사가 300유로의 벌금을 물게 된 적이 있었는데, 착한 버스 승객들이 모금을 해서 해결해주었고, 그 팀의 인솔자는 일정을 조정해 예정에 없던 곳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세월호사고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규정을 만들어 놓아도 제대로 지켜질지 의문이다.
거의 하루를 버스로 이동하는 셈이니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과 가톨릭문명의 충돌사를 요약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라나다는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1세 여왕의 가톨릭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무어인의 나스르왕국의 중심지였다. 북아프리카에 살던 무어인은 아라비아인, 베르베르인 그리고 흑인의 피가 섞인 이슬람교도들로 8세기 초에 서고트왕국이 지배하던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하기 시작해 50년 뒤에는 프랑스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했다.
명맥만 남은 카탈루냐와 나바라왕국을 중심으로 가톨릭교도들이 실지회복을 위한 레콘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이 전개됐고, 1212년에는 카스티야왕국의 알폰소 8세가 이끄는 가톨릭연합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알모아데왕조가 멸망하고 1238년 그라나다에 들어선 나스르왕국이 이슬람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됐다. 571년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숙부 밑에서 성장했다. 25살이 되었을 때, 일하던 가게의 여주인이자 열다섯 살 연상인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2남4녀가 태어났지만, 두 아들은 어려서 죽고, 딸들도 파티마(Fatima)만 남고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죽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동로마제국의 가톨릭교는 물론 토착의 유대교 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40세가 되던 610년, 무함마드는 메카 근교 히라산 동굴 속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아랍어로 지브릴)을 만나 하느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설교를 시작했고, 622년에는 메카 북쪽 야트립의 중재인으로 선출돼 메디나로 이동하였다.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동한 것을 두고 히즈라(Hijra)라고 부른다. 메디나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치와 군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를 가졌던 무함마드는 632년에 병으로 죽게 된다.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무함마드 이후에는 선출된 칼리프가 무함마드를 계승하였다. 무함마드가 죽고 30년이 지난 다음에 이슬람공동체는 3대 칼리프 우트만(Uthman)의 추종세력과 4대 칼리프가 된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Ali) 사이에 생긴 갈등으로 우트만의 추종자가 만든 수니(Sunni)와 알리의 추종자인 시아(Shi'i)로 나뉘었다.
656년 우트만을 암살하고 칼리프에 오른 알리 역시 시리아총독 아부 수피안의 아들 무아위야에 의하여 칼리프 자리는 내놓게 되었다. 알리를 밀어내고 칼리프에 오른 무아위야는 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661-750)를 열었다. 우마이야왕조 이전에 아랍부족을 지배하던 칼리프는 부족장들에 의해 선출되고 슈라(Shura; 부족회의)의 자문을 받아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아위야는 부족장들의 충성서약을 받아냈고, 선출방식이 아닌 세습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우마이야왕조를 이슬람 최초의 왕조로 보는 것이다. 우마이야왕조는 20년이 조금 넘은 684년 수피안 가문에서 마르완 가문으로 넘어갔다.
아브드 알 말리크(685~705 재위)왕이 통치할 때가 우마이야왕국의 전성기였다. 서쪽으로는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부하라·사마르칸트·크와레즘·페르가나·타슈켄트 등을 정복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의 무크란과 신드까지 이르렀다.
717년 시리아군이 비잔틴의 이사우리안 레오3세에게 패배하면서 기울기 시작한 우마이야왕조는 남부 아랍의 칼브족과 북부 아랍의 카이스족 간의 분쟁으로 군사력이 약화됐다. 우마이야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하시미야파가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새 칼리프로 옹립하여 아바스왕조가 성립했다. 아바스왕조는 우마이야왕조의 일족들을 섬멸하였지만, 아브드 알 라흐만이 살아남아 스페인으로 도망쳤고, 756년에 코르도바에서 후(後) 우마이야 왕조를 세워 자신이 이슬람사회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후(後)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면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해 이슬람문화의 중심이 됏다.
아바스왕조가 성립됐지만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여러 왕조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문명이 발전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 우월주의가 지배했던 우마이야왕조와는 달리 아바스왕조에서는 모든 무슬림이 이슬람의 우산 아래서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마이야왕조의 다마스쿠스, 아바스왕조의 바그다드, 파티마왕조의 카이로, 아랍 안달루시아왕조의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등이 순차적으로 이슬람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유목에 뿌리를 둔 아랍세계는 넓은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수준의 문화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진외래 학문에 눈을 돌렸고, 번역작업을 통하여 단숨에 이를 따라잡으려고 했다. 아랍왕조가 지배하게 된 광활한 영토에는 다양한 언어와 문명이 존재했었고, 아랍인들은 이것들을 빠르게 흡수하여 융합해나갔다.
특히 새로운 학문에 대한 칼리파들의 욕구는 대단해 경쟁적으로 후원에 나섰다. 외래문명에 대한 아랍세계의 인식은 야쿱 이븐 이스학 알 킨디의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진리가 어떤 원천에서 비롯되었건, 설령 그것이 고대인들이나 외국인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일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원칙은 첫째 고대인들이 이 문제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그대로 완전하게 인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고대인들이 충분히 표현하지 않은 것을 우리 아랍어의 용례와 우리 시대의 관습과 나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서 완결 짓는 일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명을 배경으로 성립한 이슬람문명은 이들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종교적 관용, 인종 간의 화합, 개인과 공공의 청결과 같은 문명사회의 기본적 요소들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슬람문명이 유럽사회에 건네진 곳이 바로 이베리아반도였다.
몬세라트에서 발렌시아로 가는 길에 한적한 시골마을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무로 된 이집은 현관부터 분위기가 독특했다. 일층 카운터에는 하몽이 걸려있는 등 스페인 분위기를 물씬 나는 탓에 일행 중 몇 분은 카운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점심 메뉴는 샐러드를 곁들인 스페인식으로 구운 닭다리가 전부였지만, 크기로 보아 공장에서 키워낸 닭은 아닌 듯싶었다.
음식은 깔끔하고 맛이 있었다. 문 앞에 달아놓은 각종 우수 레스토랑 인증표시가 공연한 것은 아닌가보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서울에서 싸온 음식을 꺼내는 분도 있었는데 볶은 고추장, 멸치 볶음, 깻잎 장아찌 등 어찌나 다양한지 놀랐다. 준비된 여행은 역시 관록에서 나오는 것이다. 풋고추를 내놓은 분도 있었다. 그런데 농축수산물은 세관 신고대상품목이고, 문제가 되면 상당한 처벌을 받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정오 무렵에 몬세라트를 떠나 7시간 가까이 이동하여 발렌시아에서 쉬고, 다음날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그라나다까지 역시 7시간 가까이 버스로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유럽에서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 장거리버스의 운전자가 과로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LDC(Long Distance Couch)의 규정에 따르면 버스는 12시간 이상 운행할 수 없는데, 운전자는 그 가운데 9시간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으며 4시간 동안에 45분을 쉬어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운행을 마친 버스는 11시간 안에 운행을 재개할 수 없다고 한다.
심한 도로정체를 만나는 바람에 규정을 불과 3분 초과한 버스기사가 300유로의 벌금을 물게 된 적이 있었는데, 착한 버스 승객들이 모금을 해서 해결해주었고, 그 팀의 인솔자는 일정을 조정해 예정에 없던 곳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세월호사고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규정을 만들어 놓아도 제대로 지켜질지 의문이다.
거의 하루를 버스로 이동하는 셈이니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과 가톨릭문명의 충돌사를 요약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라나다는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1세 여왕의 가톨릭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무어인의 나스르왕국의 중심지였다. 북아프리카에 살던 무어인은 아라비아인, 베르베르인 그리고 흑인의 피가 섞인 이슬람교도들로 8세기 초에 서고트왕국이 지배하던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하기 시작해 50년 뒤에는 프랑스의 일부 지역까지 차지했다.
명맥만 남은 카탈루냐와 나바라왕국을 중심으로 가톨릭교도들이 실지회복을 위한 레콘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이 전개됐고, 1212년에는 카스티야왕국의 알폰소 8세가 이끄는 가톨릭연합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알모아데왕조가 멸망하고 1238년 그라나다에 들어선 나스르왕국이 이슬람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됐다. 571년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숙부 밑에서 성장했다. 25살이 되었을 때, 일하던 가게의 여주인이자 열다섯 살 연상인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2남4녀가 태어났지만, 두 아들은 어려서 죽고, 딸들도 파티마(Fatima)만 남고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죽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동로마제국의 가톨릭교는 물론 토착의 유대교 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40세가 되던 610년, 무함마드는 메카 근교 히라산 동굴 속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아랍어로 지브릴)을 만나 하느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설교를 시작했고, 622년에는 메카 북쪽 야트립의 중재인으로 선출돼 메디나로 이동하였다.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동한 것을 두고 히즈라(Hijra)라고 부른다. 메디나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치와 군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를 가졌던 무함마드는 632년에 병으로 죽게 된다.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무함마드 이후에는 선출된 칼리프가 무함마드를 계승하였다. 무함마드가 죽고 30년이 지난 다음에 이슬람공동체는 3대 칼리프 우트만(Uthman)의 추종세력과 4대 칼리프가 된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Ali) 사이에 생긴 갈등으로 우트만의 추종자가 만든 수니(Sunni)와 알리의 추종자인 시아(Shi'i)로 나뉘었다.
656년 우트만을 암살하고 칼리프에 오른 알리 역시 시리아총독 아부 수피안의 아들 무아위야에 의하여 칼리프 자리는 내놓게 되었다. 알리를 밀어내고 칼리프에 오른 무아위야는 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661-750)를 열었다. 우마이야왕조 이전에 아랍부족을 지배하던 칼리프는 부족장들에 의해 선출되고 슈라(Shura; 부족회의)의 자문을 받아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아위야는 부족장들의 충성서약을 받아냈고, 선출방식이 아닌 세습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우마이야왕조를 이슬람 최초의 왕조로 보는 것이다. 우마이야왕조는 20년이 조금 넘은 684년 수피안 가문에서 마르완 가문으로 넘어갔다.
아브드 알 말리크(685~705 재위)왕이 통치할 때가 우마이야왕국의 전성기였다. 서쪽으로는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부하라·사마르칸트·크와레즘·페르가나·타슈켄트 등을 정복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의 무크란과 신드까지 이르렀다.
717년 시리아군이 비잔틴의 이사우리안 레오3세에게 패배하면서 기울기 시작한 우마이야왕조는 남부 아랍의 칼브족과 북부 아랍의 카이스족 간의 분쟁으로 군사력이 약화됐다. 우마이야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하시미야파가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를 새 칼리프로 옹립하여 아바스왕조가 성립했다. 아바스왕조는 우마이야왕조의 일족들을 섬멸하였지만, 아브드 알 라흐만이 살아남아 스페인으로 도망쳤고, 756년에 코르도바에서 후(後) 우마이야 왕조를 세워 자신이 이슬람사회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후(後)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면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해 이슬람문화의 중심이 됏다.
아바스왕조가 성립됐지만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여러 왕조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문명이 발전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 우월주의가 지배했던 우마이야왕조와는 달리 아바스왕조에서는 모든 무슬림이 이슬람의 우산 아래서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마이야왕조의 다마스쿠스, 아바스왕조의 바그다드, 파티마왕조의 카이로, 아랍 안달루시아왕조의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등이 순차적으로 이슬람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유목에 뿌리를 둔 아랍세계는 넓은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수준의 문화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진외래 학문에 눈을 돌렸고, 번역작업을 통하여 단숨에 이를 따라잡으려고 했다. 아랍왕조가 지배하게 된 광활한 영토에는 다양한 언어와 문명이 존재했었고, 아랍인들은 이것들을 빠르게 흡수하여 융합해나갔다.
특히 새로운 학문에 대한 칼리파들의 욕구는 대단해 경쟁적으로 후원에 나섰다. 외래문명에 대한 아랍세계의 인식은 야쿱 이븐 이스학 알 킨디의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진리가 어떤 원천에서 비롯되었건, 설령 그것이 고대인들이나 외국인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일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원칙은 첫째 고대인들이 이 문제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그대로 완전하게 인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고대인들이 충분히 표현하지 않은 것을 우리 아랍어의 용례와 우리 시대의 관습과 나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서 완결 짓는 일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명을 배경으로 성립한 이슬람문명은 이들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종교적 관용, 인종 간의 화합, 개인과 공공의 청결과 같은 문명사회의 기본적 요소들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슬람문명이 유럽사회에 건네진 곳이 바로 이베리아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