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약급여 시범사업에 관한 합리적 회의

메디칼타임즈
발행날짜: 2020-12-28 05:45:50
  • 임민식 참재활의학과의원 원장

대부분 동료 의사들은 한방 의료와 정책에 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혹시 관심이 있다면 우리 주변의 다른 직업, 예를 들면 약사나 간호사 같은 직업에 관해서 가지는 정도의 관심일 것 같다. 의사들은 스스로 의사와 한방은 완전히 다른 직업이라고 생각하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방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의사처럼 생각하고, 의사처럼 말하고, 어쩌면 스스로를 의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평소 정부의 한방 정책에 관심이 없고, 한방협회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무시하다가 뭔가 의사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터지면 그 때 비로소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라며 탄식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의사들이 크게 탄식할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소위 한방 첩약 급여화 시범 사업이란 것은 공보험의 급여화 원칙을 조금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한정된 재원으로 운영되는 공보험에서 유효성, 안전성 그리고 비용효과성 등이 불분명한 행위를 1년에 500억원이나 들여서 시범사업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사들의 반발이야 어떻든 시범사업에 참여하겠다는 한방 측의 열기는 매우 뜨거워서 불과 몇 일만에 9천 여 곳의 한방 의료기관이 시범사업 참여 신청을 하고 전국에서 1만2천명이 넘는 한방치료 종사자들이 관련 교육을 이미 수료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방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은 한방 종사자들에게 유리하기만 한 것일까?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보험 재정이 매우 부족한 한국에서 특정 비급여 의료행위의 급여화라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급여 행위인 경우에는 환자와 의료기관의 개별적 계약과 만족도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시술할 수 있지만, 급여화 되면 모든 것이 세밀하게 정의되고 그 정의와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설령 환자는 매우 만족하더라도 의료서비스 제공자는 부당하게 이익을 취했다는 오명(汚名)과 함께 환급 환수를 당하게 된다. 의사들의 영역과 한방 영역을 비교해서 몇 가지만 살펴봐도 한방에서 급여화 이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매우 많아 보인다.

예를 들면, 조제-탕전이란 행위를 한 번 세분화해서 살펴보자.

한의원에 들어가는 첩약의 원료 한약재를 검수하고, 약장에 넣어서 관리하고, 처방된 원료 한약재를 약장에서 꺼내고, 그 원료 약재들의 무게를 재고, 섞고, 탕전기에 넣고, 탕전기의 시간과 온도 등을 설정하고, 스위치를 누르고, 탕전이 끝나고 나온 시꺼먼 액체가 각각의 포장재에 제대로 담겼는지를 검사한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약을 환자에게 주면서 약의 복용 방법과 부작용 등을 설명하는 상세한 행위로 나눠볼 때, 각각의 상세 행위를 누가 해야 할까? 참고로 현재의 대한민국 약사법에 의하면 조제는 약사와 한약사의 면허 범위이고 부칙에 의해서 예외적으로 한의사가 자신이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한약 및 한약제제를 자신이 직접 조제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위에 나열한 행위 중 대부분의 행위를 한의사가 직접 해야 조제-탕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비급여 상황에서는 한의사 본인이 하든, 한약사를 고용해서 하든, 심지어 무자격자인 간호조무사가 한방 조제-탕전에 관여해도 지금까지는 관심 갖는 이가 거의 없었지만, 현재 약사가 직접 조제하는 약국의 10일치 조제관련 수가와 비교해서 5배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조제-탕전 행위에 대해서 심사평가원과 공단 등에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도에 의하면 2019년 국정감사 기간에 윤일규 의원은 한방의 원외 탕전실 한 곳이 2000여 곳의 한방 의료기관과 거래하는 경우도 있고, 한약사의 한약 조제건수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약국에서는 약사 면허 당 조제 건수가 75건 이상일 경우에 일정 비율로 수가를 감액하는 차등수가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복지부는 약국의 차등 수가제를 풀어주거나, 한의사 또는 한약사의 조제 건수를 제한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것이 마땅한데, 조제 건수 제한을 통해서 의료의 질을 향상 시킨다는 명분을 훼손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만약 복지부가 원외 탕전실에서 상근하는 한약사에게도 차등 수가제를 시행한다면 하루에 한약사 면허 당 몇 건 정도가 적당할까? 필자는 약국 수가 대비해서 본다면 아마도 20명 정도일 것이고, 최대 30명을 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1993년에 약사-한의사 분쟁 합의에 따른 한방 의약분업이 숙제로 남아 있다는 것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방협회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하는 것 같긴 한데, 기왕에 공보험에서 첩약을 급여화 하는 마당에 무슨 비방이니 한의분야에서는 의약일체니 같은 변명이 통하기 어렵다.

기존에 없던 한약사라는 직업을 만든 이유도 결국 한방의약분업의 준비 작업이었다고 본다면 첩약 급여화 이후에 논의가 급격하게 진행될 것은 분명하다. 한방에서는 한방 의약분업 이후에 어떤 형태로 진료를 하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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