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시만 남았다,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모채영 학생(가천의대)
발행날짜: 2022-10-11 06:32:59
  • 모채영 학생(가천의대 본과 4학년)

본과 4학년 2학기. 본과 1학년 1학기의 나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때가 오고야 말았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나의 눈 앞에 지난 6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인생의 큰 단계 하나를 마무리하는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이 곳에서의 경험이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조금씩 되짚어본다.

나의 예과 생활은 공부밖에 모르던 수험생에서 대학생으로의 변천 과정이었다. '인생 처음' 혹은 '성인 되고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어디든 따라붙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술들을 하나 둘씩 마셔보고 이국적인 음식들을 맛보고 다녔다. 인생 처음으로 숙취를 경험했다. 가본 적 없는 곳들을 가고 해본 적 없는 것들을 했다. 모든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가장 설레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본과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내 뜻대로 일들은 따라주지 않았고 세간에서 악마화 되어 뜬소문으로 떠도는 의대생의 시험기간은 생각보다 버틸 만했다. 그러나 버팀목이 하나는 필요했다. 집과 학교라는 짧은 이동 경로에 갇혀 있는 나에게 여행 계획을 잡아두고 손꼽아 기다리는 낙 정도는 있어야만 했다. 학생의 작은 소망을 무참히 꺾은 것이 본과 2학년 초 닥친 역병이었다. 5월이면 끝난다던 비대면 수업이 2년을 갔다. 누구에게는 축복이었고 누구에게는 악몽이었다.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축복이었고, 이곳저곳 다니는 걸 좋아하는 나의 발길에는 악몽이었다. 그러한 양가 감정을 버텨가며 동맹휴학 사태를 지냈고, 어느새 나의 이름 앞에 ''학생 의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년 반 동안의 실습 기간은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본과 1학년의 한 학기보다도 짧게 느껴진다. 책상 앞에 앉아서 아이패드만 들여다보는 것보다, 병원에 가서 걸어 다니며 '무언가'를 한다는 게 시간의 화살을 빨리 움직이게 했다. 전자 의무 기록(EMR) 읽는 법이 익숙해지고 EMR 프로그램 다루는 게 새롭지 않을 무렵이 되니 본과 3학년이 끝났고, 이미 병원 생활이 익숙해진 사람에게 한 학기의 실습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어느덧 여섯 번째 해. 의대생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던, 지식의 부족으로 감히 '의학'이라는 학문을 논할 수조차 없었던 예과생 티를 완전히 떨쳐낸 본과 4학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많이 달랐다. 멀게만 느껴지던 의대 생활 ‘이후’의 삶이 방문을 노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이후로 평생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던 내가 사회의 냉정한 심판대 앞에 서는 때가 온 것이다.

누구도 나의 실수를 대신 책임져주지 않고, 그동안은 '모의'라는, '실습' 혹은 '연습'이라는 글자 아래서 맴돌던 내 의학적 지식과 행위들은 유형의 결과를 낳기 시작한다. 이십대 초반을 한참 지나서, 다시금 '인생 처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고작 너덧 달 뒤, 나는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서 또 다시 '인생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무수히 따라붙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지난 6년간의 의대 생활은 아둔한 수험생을 한 명의 사회인으로 깎아냈다. 완벽할 자신감이나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 현실을 잘 알아버렸지만, 어쩌면 그러한 깨달음이 앞으로의 삶을 견뎌내기 위한 준비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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