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진료만으로 유지되는 시범병원을 만들어 보자

권용진 교수
발행날짜: 2022-10-04 05:00:00 수정: 2022-10-04 08:17:59
  • 서울대병원 권용진 교수

기승전 '수가'라는 말이 있다. 헬스케어 혁신을 논하다 보면 결론은 수가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는 수가가 낮다는 뉘앙스가 포함돼 있다. 수가가 너무 낮아서 헬스케어 산업의 혁신이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00년 의약분업 시행 이후 건강보험 재정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에도, 향후 재정지출이 더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적정수가’ 논쟁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 갈등의 출구는 없는 것일까?

학술적 관점에서 수가논쟁에는 두 가지 오해가 존재한다. 첫째는 행위별수가제와 포괄수가제 논쟁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포괄수가제는 질이 낮아지는 나쁜 지불제도라고 생각한다. 이는 학창시절 예방의학 시간에 배운 지식을 근거로 한다. '행위별수가제는 서비스 질이 높으나 비용이 많이 들고, 포괄수가제는 비용은 낮으나 서비스 질이 낮다'라는 공식이다. 시험 답안지용 족보수준의 얘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적정수준의 의료서비스 질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지불제도는 무엇인가'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기관의 특성, 서비스의 특성, 자원의 한계 등에 따라 다양한 지불제도가 공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둘째는 수가가 정해진다고 해서 진료량을 마음껏 늘릴 수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수가는 가격을 정하는 것인데, 상대가치제도 하에서 가격을 정하기 위해서는 정의된 행위에 대한 인력과 시간이라는 투입량이 입력되어야 한다. 의사들의 수입도 변수 중 하나다. 바꿔 말하면 수가를 받는 대신 정의된 인력과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재는 수가가 낮기 때문에 적은 인력으로 많은 행위량을 제공하는 것이 용인되고 있지만, 수가를 인상한다면 적정인력의 투입과 적정시간의 투입은 지켜져야만 한다. 행위의 총량이 많아지면 가격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오해를 보정해보면 수가는 올라갈 수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질이 보장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행위별수가제 외에 다양한 지불제도가 공존할 수 있다. 행위별수가제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 의사들의 수입이 어느 수준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건강보험이라는 국가 단일보험자가 유일한 지불자(payer)인 시스템에서는 한 번 가격을 정하면 더 이상 가격경쟁을 위한 효율화 기전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료량을 늘려야 하는데, 적정진료를 위해 허용되는 진료량도 통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인건비 상한선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 고정된다고 봐야 한다. 이는 의사뿐 아니라 보건의료종사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결국 기승전 '수가'를 해결하려면, 수가를 인상하면서 질이 보장되는 다양한 지불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의사들을 포함한 보건의료종사자들의 노동강도를 낮추고, 그만큼 환자들에게는 안전과 질을 보장하는 방향이 가능할 것이다. 삶의 질이 중요한 MZ세대 보건의료종사자들에게는 수입만큼이나 '워라밸'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워라밸까지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으니 시범사업부터 해보는 것이 필수다.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노동강도를 낮춘다는 의미는 진료 환자 수가 적어진다는 의미다. 따라서 지금보다 단위시간당 수입이 감소하기 때문에 총수익을 보장해야만 시범사업이 가능하다. 이런 논리로 기획된 사업이 15분진료 시범사업이었다. 신청병원들은 15분에 한 명씩만 진료예약을 받을 수 있다. 참여한 환자나 의료진의 만족도는 당연히 높았다. 전면적 시행이 아니기 때문에 보완해야 할 점들도 있다. 지난 정부에서 활성화되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쉽다. 그럼에도 이 사업의 고도화가 이루어진다면 헬스케어 혁신 전략으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우리나라 의료진의 실력과 기술 인프라라면 세계 최첨단 병원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 병원은 의료인들의 삶을 갈아 넣어 작동되고 있다. 지속가능성이 매우 낮다. 좁은 공간과 노동집약성은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병원의 디지털 대전환 시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전환의 모멘텀이 필요한 때다. '오전 외래 50명 진료'라는 초인간적인 대학병원 외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시작이 될 수 있다. 과감한 투자를 통해 모든 외래를 15분에 한 명씩 진료하는 '15분 진료 시범병원'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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