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차병원 소아응급센터 박수현 교수(전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
"선생님 아이 경련해요."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이미 중증베드부터 경증 베드까지 눕힐 침상이 없어진 지 오래다. 하루 응급실 내원 소아 환자가 160명이 넘는 상황, 이미 대기실은 명절 터미널 대합실처럼 앉을 공간도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의료진 중 누구도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진료를 보고 있지만 아직 진료보지 못한 환자가 더 많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아이들 상태에 따라 겨우 침상 돌려 막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수액과 검사를 위해 침상을 오래 대기하던 다른 환아가 있었지만 우선권은 경련한 아이에게 넘어갔다. 대기실에 앉아있다가 아이가 경련하였기 때문에 아이에게 몹시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경련 전에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빈 침상은 없었다. 급하게 외상 처치를 하는 침상을 끌고 와 아이를 눕히고 경련을 멈추는 약을 투약하고 포터블 모니터(이동 가능한 생체 징후를 체크하는 기계)를 달고 아이 상태를 체크했다. 이로써 응급실 내 경련 환아만 넷이 되었다.
놀랐을 보호자에게 한참을 설명하고 추가 처방을 내기 위해 앉기가 무섭게 119 네 곳에서 수용문의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네 곳 모두 경련했다는 아이들 이었다. 유난히도 경련 환자를 많이 보는 탓에, 나에게는 '경련 자석(seizure magnet)' 이라는 별명이 있다. 이런 내게도 이 상황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네 곳 모두 아이는 경련이 멈춘 상태였고, 생체징후도 안정적이었다. 만일 환아가 경련 중이거나 생체징후가 안 좋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이라면 거의 무조건 수용한다. 심정지나 당장 쇼크 상태이면 가까운 병원에서 수용해야 빠른 처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라면 근거리에 있는 환아를 받고 싶었지만, 여기서 30km 이상 떨어진 경기 북부 119가 경기 동남부 병원까지 연락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통화해보니 근처 어느 병원에서도 환아 수용이 안되었다고 한다. 일단 이 환아를 먼저 받기로 했다. 침상이 날 때까지 필요에 따라 구급차 침상이라도 이용해야 할 수 있음을 양해 구했다. 다른 119에는 근처 다른 병원에 수용문의를 부탁해보고 혹시라도 안되면 다시 한번 연락을 달라고 했다.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경련까지 한 응급환자인데 안 받아주는 것은 무책임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충분히 못한 의료자원 속에서 중증환자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중증 환아 한 명을 보려면 호흡, 심장리듬, 산소포화도, 호기말 이산화탄소, 혈압, 심박수 등을 포함한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약물을 투약할 때도 환아 몸무게와 연령을 고려해야 하고, 쉽게 상태가 악화되거나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주의해야 한다.
단순 열성 경련도 있지만, 간질지속증(status seizure)처럼 경련이 멈추지 않아 결국 심정지까지 가는 무서운 경우들도 있다. 의료진들이 말하는 '베드가 없다'는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의 침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베드에는 환자를 모니터 할 수 있는 기계와 숙련된 의료진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분명 거절을 받은 119와 그 안의 환아와 보호자는 발을 동동 구르고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받기 어려울 거 같다는 대답을 남긴 의료진도 마음이 무겁다. 분명 의료자원이 없는 상태로 그 환아를 받았다면 오히려 모니터링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개별 상황과 구급대원, 보호자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괴롭긴 마찬가지이다.
보통의 응급실에서 환자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 병원이 가지고 있는 의료자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지금처럼 응급실 내에 공간이나 인력, 기계들이 전부 사용 중일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려 수용능력을 벗어난 경우도 의료자원의 포화상태로 수용불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애초부터 해당 의료자원이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응급수술이 안 되는 병원의 응급실이 수술이 필요한 기전으로 다친 환자를 받으면 수액, 수혈은 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인 수술이라는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소아를 본 적 없는 의사에게 소아진료를 무조건 수용하라고 하는 것은 소아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병원에 모든 의료자원을 다 충분히 배치하라고 할 수는 없다.
병원들 간의 효율적인 역할 분담과 효과적인 환자 이송이 필요하다. 이는 몹시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해결책이라고 효율적인 정책방안을 짧게 제안하기는 어렵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부분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의료자원이 부족한 곳에 환자가 보내지거나 의료자원 문제로 환자가 적절한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하면 이는 재난에 가까운 상태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많은 고민과 토의 그리고 개선이 절실한 상태이다.
119 구급대원들과 병원의 응급실은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가장 물리적으로도 가깝고 심적으로도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선 적지 않게 갈등 상황들이 발생한다. 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해주고 빠르게 치료 받게 해주려는 구급대원의 마음과 제한된 환경이나 부족한 의료자원 속에서 환자의 선택권이 제한되기 보다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분산되길 바라는 의료진의 마음이 부딪히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마음은 같으나 보는 관점들이 조금씩 다르면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119와 응급실 모두 힘든 환경이다. 서로 다투고 적대하면서 마음 상하기 보다 같이 조금 더 협력하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가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