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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트랙에는 사람이 많다

단국의대 1학년 유우선
발행날짜: 2025-12-15 05:00:00
  •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1학년 유우선
    투비닥터 편집팀

약리학 3차 시험이 끝났다. 어제는 밤을 샜고, 다음 주는 병리학과 예방의학, 신경생리학 시험이 몰아친다. 그리고는 본과 1학년의 한 학기가 장장 2년 만에(예기치 않은 휴학 기간을 셈하여) 끝이 난다.

본과는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공부량이 많아서, 하도 소문이 자자해서는 아니고, 그냥 내가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낼지가 빤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매몰될 내가 보였다. 그저 의사로서의 배움에 성실히 임하면 된다는 대전제보다, 그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것들, 이를테면 성적, 시험 결과나 완료도 같은 것들에 매몰될 나. 학기 시작 전에는 하는 데까지만 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면 돼, 수없이 혼자 글을 쓰고 되뇌이면서 생각 정리를 해보았지만 내심은 별로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8월 개강 이후 4개월은 예측 그대로 흘러갔다. 훅 줄어든 수면 시간, 어마어마한 공부량에 쫓겨 만성적으로 갖게 된 초조감, 매주 시험 결과에 따라 널뛰는 흥분과 좌절. 이 모든 것은 빵빵하게 하루하루를 채워 내 일과를 아주 불건강하게 부풀렸다. 엊그제 병리학 교재에서 본 Myocardiac hypertrophy에 빠진 심장처럼, 비대해진 하루를 짊어지고 사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이다.

그것이 임계점을 넘었을 때는 지난 주말이었다. 1주일에 최다 시험을 3개까지는 경험해보았지만, 학기의 마지막 2주 동안은 시험 7개에 실습까지 하나가 몰아칠 예정이었다. 그에 대비하여 지난 주말에는 당장 다음 주에 봐야 할 약리학 3차 시험 준비는 우선 잠시 밀어두고 다른 과목을 준비했다. 아침 8시부터 스터디카페에 앉아 밥도 먹지 않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가 다 지나 문득 진도를 짚어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오늘 계획한 목표량에 도달하기에는 한참 모자랐고, 아침에 한 페이지는 다시 펼쳐보면 새롭기만 했다.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그래도 나름 많은 로딩과 과제를 감당하면서 타파할 계획을 늘 세워왔는데 지금은 그 계획조차 세울 수가 없었다. 그대로 의욕이 꺾이자 더 이상 스터디카페에서는 버틸 수 없어 집으로 가 침대에 몸을 묻었다, 자야 해, 하고 되뇌이면서도 속이 복잡했다. 외운 것과 외우지 못한 것, 이해한 것과 모르는 것이 한 뭉치로 뒤섞여 머리를 끈적하게 더럽혀 푹 자지도 못했던 지난주의 밤이었다.

그렇게 주말이 끝나고 학교에 가는 것도 괴로웠다. 학교에 가면 또 나보다 열심히 하고 나보다 많이 공부해둔 동기들이 있겠지. 체력도 좋고 머리도 좋은 애들이 좀 덜 열심히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내가 어찌어찌 나아갈 틈이라도 나올 텐데 이들은 열정까지 빠지는 면이 없어 나를 옴싹달싹 못하게 한다. 오늘 아침부터 그 풍경을 보아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다.

무너진 몸과 마음을 그러앉고 돌아본 강의실에는 역시 열기를 온몸으로 뿜는 동기들이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집중하는 동기도, 눈을 감고 암기를 하다가 그대로 잠들 뻔한 동기도 있었다. 서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 열을 내어 설명을 하고 머리를 싸매거나, 졸음껌에 커피를 연신 들이키는 풍경은 예사였다. 그런 동기들을 보자 주말 내내 부산하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를 더 무너뜨릴 줄 알았던 강의실은 되려 내 손에 펜을 다시 쥐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경쟁심이라고 읽었을 마음이다. 지기 싫으니까, 남들 하는 만큼 해야 하니까 다시 독기를 갖고 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나 경쟁으로 버틸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음을 알았다. 경쟁이 과열되었던 학기 초는 한참 지나 이제 마지막 몇 주만을 남겨두었는데도 공부할 것은 여전히 많고, 체력은 실시간으로 고갈되고 있으며, 모두가 전에 비해 지쳤다는 것이 자명했으니까. 이제는 충격을 받을 겨를도 없다. 순간순간 무너지는 자기 자신을 건져 올리며 달리기를 지속해야 하는 시기이다. 내가 주말에 넘어졌던 그 트랙은 다른 사람과 완주 시간을 경쟁하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스스로의 완주를 두고 버티는 마라톤 트랙이었다.

이를 인지하고 주변을 바라보자 확 체감되었다. 각자의 속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동기들, 그러니까 동료들의 달리기가 있었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버티며 뛰고 있다는 그 사실에 기운이 났다. 모두가 참 대단하고, 또 좋아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주변인, 동료애, 그런 것에 영향을 받는 타입은 전혀 아니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오히려 혼자 시간과 로딩을 감내하고 버티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또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강의실로부터 전해져 온 그 감응이 더 나를 생경하게 했다. 나를 버티게 하는 건 늘 나 뿐이고, 그 생각은 바뀔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시간으로 대략 40명의 사람에게 건져 올려지는 감각은 참으로…낯설고 고마웠다.

물론 그들이 내 어리숙한 동료들이 나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해준 것은 없었던 상황이나, 그저 내 옆을 뛰는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근육에 에너지를 주는 기분이었다.

동기라. 괜히 '同'자를 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되어 같은 과정을 밟는 이 사람들은 너무 당연해서 무감해지나 또 당연하게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상처를 핥는다.

고작 본과 1학년 한 학기가 지났으니, 앞으로 달려야 할 남은 트랙이 훨씬 더 길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한 번 넘어지고, 또 시 일어나면서 위안이 되는 사실을 몇 가지 더 알았다. 물통은 나만 하나밖에 못 든 줄 알았는데, 옆에 한 모금 정도야 나눠줄 사람이 있다는 것. 최소…40명 정도는. 나만 혼자 뛰면서 힘들어한다고 생각하며 외로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 똑같은 사람들 최소 40명은 있으니까.

다음 주는 시험 5개가 남아있는 지옥의 한 주인데, 내 바보같이 우직한 동기들이 또 열심히 잘 버텨주길 바란다. 그럼 나도 수시로 고개를 들어 그 달리기에 합류할 힘을 얻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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