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관동대학교 본과 2학년 배지섭

필자는 스스로에게 퍽 인색한 편이다. 어지간한 성취에는 '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고, 웬만한 흔들림 앞에서는 '냉철함'이라는 가면을 먼저 고쳐 쓰곤 했다. 의대에 발을 들인 이후, 나의 세계에서 평정심은 추구해야 할 미덕을 넘어 반드시 갖춰야 할 삶의 도구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렁이지 않는 고요한 수면 같은 마음. 필자는 그것이 어른의 자격이자, 한 명의 의료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마땅한 농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매일 쏟아지는 강의록과 직접 지원해 다녀온 여러 병원 실습, 뿐만 아니라 내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현장 사이에서, 필자가 마주한 것은 완벽한 고요함이 아닌 끊임없는 균열이었다. 한때는 그 균열을 나의 미숙함이라 치부하며 외면하려 애썼으나, 이제는 그 틈새를 통해 비로소 평정심의 진정한 얼굴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1. 쿨함이라는 허울과 내면의 파동
우리는 유독 '쿨함'이 숭상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감정의 파고를 드러내는 일은 촌스러운 일로 치부되고, 불안을 내비치는 일은 전문성의 결여로 여겨지곤 한다. 특히나 '일희일비하지 마라'는 인생 선배들의 가르침은 나 같은 흔들리는 영혼에게 마치 절대적인 계율처럼 다가온다. 그 가르침은 분명 우리를 단단하게 단련시키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의 가장 인간적인 떨림을 '도려내야 할 군더더기'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마음이 어찌 항상 고요한 호수일 수 있을까. 밤을 지새우며 눌러 담은 지식이 무색해질 만큼의 무력감을 느낄 때, 혹은 누군가의 고통이 내 살갗을 스치는 듯한 통증으로 다가올 때, 우리 마음은 필연적으로 흔들린다. 이때 필요한 것은 "괜찮다"라는 무미건조한 자기 암시가 아니다. "나는 지금 이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구나"라고 나 자신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인정의 시선이다.
2. 미디어가 투영하는 현대인의 초상: 회피형, 불안형, 그리고 안정형
최근 대중 매체와 SNS를 휩쓸고 있는 화두 중 하나는 단연 '애착 유형'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을 '회피형 인간(Avoidant)', '불안형 인간(Anxious)', '안정형 인간(Secure)'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분석하기를 즐긴다. 미디어는 흔히 '안정형'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유토피아로 묘사하고, '회피형'이나 '불안형'을 교정해야 할 결함처럼 다룬다.
의학적 환경에서 이 워딩들을 복기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과도한 업무량과 감정 노동에 노출된 젊은 의사들은 종종 '선택적 회피형'이 되기를 자처한다. 감정적 소모를 막기 위해 환자와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두거나, 자신의 불안을 외면하기 위해 업무 자체에만 매몰되는 식이다. 반대로 완벽주의에 함몰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역량을 의심하는 '불안형'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안정형 인간'은 결코 불안을 느끼지 않거나 회피하고 싶은 욕구가 없는 초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의 안정형은 자신의 불안을 인지하고, 때로는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사실조차 투명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다. 즉, 평정심의 본질은 유형의 구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는 태도에 있다.
3. 회피와 인정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흔히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때, 우리는 '회피'라는 도피처를 찾는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직면하는 대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회피는 일시적인 진통제일 뿐 근본적인 치료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억눌린 감정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번아웃'이나 '냉소주의'라는 이름의 부작용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관건은 본인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두렵구나", “나는 지금 저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눈치를 보고 있구나”, "나는 지금 저 환자의 고통에 깊이 동요하고 있구나"라고 인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나무는 강한 태풍에 꺾이기 쉽지만, 바람의 방향에 맞춰 함께 흔들리는 유연한 가지는 부러지지 않는다.
인정은 무책임하게 감정에 휩쓸리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파도를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메타인지의 과정이다. 내가 흔들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흔들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선택권을 갖게 된다.
4. 일희일비(一喜一悲)를 넘어, 인간적인 자아로 거듭나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혈액 수치 하나에 안도하고, 예상치 못한 합병증에 밤잠을 설치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이자, 환자의 삶에 책임을 느끼는 의료인이라는 증거다. 이뿐만일까.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마음을 앓고, 서툰 관계의 끝자락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 역시 우리가 여전히 삶의 무늬를 그려 나가는 투명한 청춘이라는 증거다.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격언은 감정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감정의 파고에 매몰되어 다음 판단을 그르치지 말라는 경계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평정심이란 고요한 호수 같은 상태가 아니라, 거친 바다 위에서도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항해사의 평형감각과 같다. 배가 파도에 따라 기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리적 현상이다. 항해사가 해야 할 일은 배가 기울지 않게 막는 것이 아니라, 기운 만큼 키를 다시 조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5. 흔들려도 괜찮은 우리들을 위하여
살아가며 우리가 마주할 수만 가지의 상황 속에서, 평정심은 언제나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향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완벽하게 고정된 '안정형'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불안하고, 때로는 회피하고 싶으며, 매 순간 흔들리는 존재들이다.
중요한 것은 회피하지 않는 용기다. 내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의 비참함을, 공명하는 나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그 인정의 태도 위에서라야 비로소 가짜 평온함이 아닌, 단단하고 유연한 진짜 평정심이 싹틀 수 있다.
여전히 길 위에서 서툴게 중심을 잡고 있을 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을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흔들림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그리고 누군가의 삶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다. 그러니 기꺼이 흔들리자. 그 흔들림 끝에 닿을 우리의 평정심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단단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