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 박요한

어릴 적 즐겨보던 만화영화를 떠올려보면, 주인공의 이름이나 기술 앞에 '슈퍼'나 '짱' 같은 수식어가 붙으면 무조건 강하고 멋져 보였다. 물론 그것이 늘 완벽한 승리를 보장하는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악당에게 쓰러지더라도 묵묵히, 그리고 꿋꿋이 다시 일어나 기어코 '슈퍼짱' 필살기를 쓰고 마지막에 승리해 내는 주인공은 정말 멋졌다. 내 올해 새해 계획은 바로 그 '슈퍼짱 어른 되기'로 정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의과대학생은 대개 6년의 긴 학업 기간을 거친다. 다른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고 본인의 커리어를 쌓을 시점에도 여전히 학업에 매진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똑같은 교실, 똑같은 자리에서 수업을 듣노라면, 나이는 어엿한 어른이지만 여전히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과연 나는 어른인가.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2026 새해 계획까지 '훌륭한 어른 되기'로 정해놓고 보니, 이런 고민은 피할 수가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어른인 나이지만 생활 패턴은 여느 고등학생과 다르지 않은 삶. 동창들은 결혼과 내 집 마련, 부모님 노후대책에 대해 고민할 때, 나는 시간표와 시험범위, 과제 마감 일정을 고민하는 삶. 고등학생도, 어른도 아닌, 정말 그 사이 어딘가.
어른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어른다운 어른들을 목도하는 곳이 있다. 바로 다름아닌 장례식장이다. 조부상 당시, 아버지는 울다가도 애써 조문객을 맞이하셨고, 화장을 마친 뒤에는 곧장 근무하러 가셨다. 처음에는 어른이란 슬퍼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본 어른들은 감정을 지워버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충분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처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채, 그 이후의 삶까지 살아내는 사람들. 어쩌면 어른이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되, 그 앞에서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는 사람.
어른을 이렇게 수용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려 하자 불현듯 몇 달 전 복싱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휴학 당시, 어릴 적 로망이던 복싱을 개강 직전까지 몇 달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나자, 첫 스파링을 했다. 그 첫 스파링은 아직까지 내가 잊을 수 없는데, 제대로 된 주먹도 뻗지 못한 채 그저 주먹을 피하려고만 하다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왼쪽으로 피하면 신기하게도 왼쪽으로 주먹이 날아왔고, 오른쪽으로 피하면 기가 막히게 오른쪽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마치 인생의 어려운 일들은 내가 물러서는 방향으로 더 집요하게 날아드는 것처럼.
스파링 직후 나는 분에 못 이긴 나머지 관장님께 철없는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복싱을 잘할 수 있느냐고. 그때 관장님이 해주신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관장님은 먼저, '날아오는 모든 주먹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떻게든 주먹을 피하려고 몸을 크게 좌우로 움직이면 무게 중심이 흔들려 결국 상대가 느끼기에 샌드백과 다를 바 없다고. 피할 수 없어도 무게 중심을 잡고 상대의 날아오는 주먹에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머지않아 복싱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랬다. 중요한 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그저 맞고만 있으면 안 되었다. 또, 움츠러들면 안 되었다. 링 위에서 움츠려있는 상대만큼 때리기 쉬운 상대는 없으니까. 매 순간의 승부를 모두 이길 수는 없다. 모든 주먹을 다 피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맞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날아오는 주먹에 신음하면서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내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는 것. 어쩌면 내가 어른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태도였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훌륭한 의사가 되는 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그 삶을 직접 살아보지 못한 내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의사라는 직업 또한 수많은 한계와 실패, 그리고 내 진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상황 앞에 자주 놓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을 막아내는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 안에서 끝까지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의사도, 내가 되고 싶은 어른도, 아마 그런 모습일 테니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 새해 계획은 처음부터 조금 잘못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훌륭한 어른 되기'라는 말은 어딘가 지나치게 완벽하고 무거워서, 지금의 나로서는 버겁게 느껴진다. 나는 그렇게 빈틈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쉽게 흔들리고, 자주 겁을 먹고, 때로는 감당해야 할 고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내가 되고 싶은 것은 훌륭한 어른이라기보다, 실패와 한계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뒤로 물러서지는 않는 사람, 피할 수 없는 주먹 앞에서도 묵묵히 내 스텝을 밟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좋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내 식대로, '슈퍼짱 어른 되기' 정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