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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국자와 티스푼

손문호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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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날짜: 2026-10-12 05:00:00
  • 손문호 메디칼타임즈 칼럼위원
    대한병원의사협의회 정책고문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칼럼위원]대한민국 의료는 오랫동안 '동네의원–병원–종합병원–상급종합병원'으로 이어지는 의료전달체계를 기본 골격으로 유지하여 왔다. 경증과 만성질환은 가까운 의원에서 진료하고, 보다 전문적인 검사와 입원이 필요한 경우 병원으로, 중증·난치질환은 대학병원과 상급종합병원으로 연결하는 구조이다.

이러한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1차 의료기관이 튼튼하여야 한다.

그러나 최근 의료현장을 바라보면 우리나라 의료시장은 진료의 질과 접근성만으로 경쟁하는 구조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 실손보험을 비롯한 각종 민간보험의 확대와 함께 의료기관의 경쟁력에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보험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는가'라는 능력이다.

이를 다소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실손보험이라는 커다란 냄비 앞에서 대학병원과 대형병원은 큰 국자를 들고 있고, 전문병원은 큰 수저를 들고 있으며, 동네의원은 작은 티스푼을 들고 있는 형국이다.

규모가 큰 의료기관일수록 보험제도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과 인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다.

대학병원과 대형병원에는 원무, 심사, 보험청구, 상담, 고객관리 등 각종 행정조직이 존재한다. 전문병원 역시 여러 명의 행정직원과 상담인력을 두고 환자의 진료 전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의료코디네이터'라는 이름으로 진료와 검사, 입원, 비급여 치료, 보험서류 발급까지 환자의 의료이용 전반을 관리하는 인력이 하나의 전문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환자는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보험 가입 여부와 보장내용을 상담받고, 어떤 검사와 치료가 가능한지 안내받으며, 진료가 끝난 뒤에는 필요한 서류와 보험금 청구 절차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의료기관 입장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은 환자 유지와 매출 관리에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

그러나 의원급 의료기관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의원은 의사 한두 명과 소수의 간호·행정직원이 진료와 접수, 상담, 보험청구, 각종 행정업무를 함께 담당한다. 환자 한 명을 진료하는 동안에도 전화상담, 처방전, 진단서, 건강보험 심사, 자동차보험, 산재보험, 실손보험 관련 서류까지 수많은 행정업무가 뒤따른다.

별도의 보험상담팀이나 의료코디네이터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따라서 보험상품이 복잡해지고 보험금 청구가 의료이용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의원급 의료기관은 구조적으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의료기관의 경영규모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자는 점차 자신의 질환만을 보고 의료기관을 선택하지 않는다. 보험금 청구가 편리한 곳, 검사와 치료를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곳, 입원이 가능한 곳, 보험서류를 체계적으로 발급해 주는 곳을 찾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규모가 큰 의료기관은 더욱 많은 환자를 끌어들이게 되고, 규모가 작은 의원은 상대적으로 환자를 잃게 된다.

결국 의료기관의 경쟁력이 진료능력뿐만 아니라 보험 활용능력과 행정조직의 규모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장기간 지속된다면 가장 먼저 흔들리는 곳은 1차 의료이다.

1차 의료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의료체계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고혈압, 당뇨병, 감기, 근골격계 질환과 같은 일상적인 질환을 가까운 곳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질병이 악화되기 전에 발견하며, 필요할 경우 상급 의료기관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대형병원이 중증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도 결국 경증환자와 만성질환자를 1차 의료기관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원급 의료기관이 쇠퇴하면 경증환자까지 병원과 대형병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대형병원에는 더 많은 환자가 몰리고, 중증환자를 위한 의료자원은 경증환자에게 분산된다. 검사와 입원은 늘어나고 전체 의료비 역시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1차 의료의 붕괴는 동네의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의료시스템의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의료정책은 의료비 증가의 책임을 주로 의료공급자에게 물어왔다. 과잉진료, 비급여 증가, 불필요한 검사와 치료를 문제 삼아 의료기관을 규제하는 방식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보험상품과 보험제도가 의료기관 사이의 경쟁조건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실손보험은 환자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 주었지만, 동시에 비급여 시장을 크게 확대하였다. 이후 의료기관은 보험에 적응하기 시작하였고, 규모가 큰 의료기관일수록 그 변화에 훨씬 빠르고 조직적으로 대응하였다.

보험이 단순히 의료비를 보장하는 제도를 넘어 의료기관의 운영방식과 환자 유치방식까지 변화시킨 것이다.

그 결과 의료의 경쟁이 점차 '누가 더 잘 진료하는가'의 경쟁에서 '누가 보험을 더 잘 활용하는가'의 경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의료기관의 경쟁력은 보험금 청구를 얼마나 잘 도와주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 환자와의 신뢰, 지속적인 건강관리 능력이 의료기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특히 정부는 1차 의료기관이 대형병원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쟁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의원급 의료기관에는 의원급 의료기관만의 역할이 있으며,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호와 지원이 필요하다. 행정업무를 줄이고, 만성질환 관리와 예방의료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며, 경증환자가 1차 의료기관을 이용하도록 의료전달체계를 다시 정비하여야 한다.

민간보험 상품을 설계할 때에도 해당 상품이 특정 규모의 의료기관으로 환자를 집중시키는 효과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험상품이 의료시장의 구조까지 바꾼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금융상품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건의료정책의 영역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의료는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대형병원과 전문병원의 규모와 조직력을 더욱 키우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국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료를 제공하는 1차 의료를 다시 살릴 것인지 선택하여야 한다.

대형병원에는 큰 국자를, 전문병원에는 큰 수저를, 동네의원에는 티스푼을 쥐여 주는 의료시장으로는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를 만들 수 없다.

보험은 환자를 보호하여야 한다.

그리고 의료제도는 의료기관의 크기가 아니라 역할에 따라 작동하여야 한다.

동네의원이 무너지면 결국 환자가 갈 곳도 사라진다.

대한민국 의료를 지키는 출발점은 거대한 병원을 더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환자를 가장 먼저 만나는 1차 의료를 다시 튼튼하게 만드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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