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

양기화
발행날짜: 2015-01-06 05:43:51
  • 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8]

알람브라궁전의 추억(3)

일촉즉발, 한바탕 비를 쏟아낼 듯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서 다급하게 알카사바(Alcasaba)로 몰려가는 바람에 주변을 찬찬히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카를로스5세궁전의 맞은편에 서 있는 와인문을 지나면 알카사바요새 아래 알히베스광장이 펼쳐진다. 와인문의 말발굽아치 천장에는 섬세한 그림이 남아 있다. 알히베스광장을 막아선 붉은빛의 성벽 가운데 나 있는 작은 출입구를 통해 알카사바 요새로 들어간다.

알카사바는 지금까지 본 카를로스5세 궁전이나 나사리에스 궁전의 우아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알람브라궁전이 들어선 언덕에 처음으로 들어선 성채도시라서 아무래도 거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카사바에 들어서면 전형적인 중세성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내부 중정, 아르마스 광장에 이른다. 광장은 평시에는 군대의 훈련장으로, 전시에는 군대를 검열하는 장소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광장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쪽의 주거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복잡하게 구성된 북쪽 주거지는 크기가 서로 다른 집들이 길과 벽으로 나뉘고 있어 초기 왕실거주지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남쪽 주거지는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창고나 병영일 것이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거칠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서쪽 끝에 서 있는 전망타워에는 올라가봐야 했다. 전망타워로 가는 길 양편으로는 벽돌로 된 건물의 기단과 지하구조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지하토굴은 깔때기를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나, 곡식과 소금 그리고 향신료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고 한다.

벨라의 탑이라고 부르는 30미터 높이의 전망탑은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했기 때문에 태양의 탑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알람브라를 점령한 가톨릭교도들이 탑의 북쪽에 종을 설치한 다음에는 종탑이라고 했는데, 이곳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저녁에 통행금지를 알리는 등 그라나다 도시의 생활리듬을 결정하는 상징이 됐다는 것이다. 알람브라성이 함락된 1월 2일에는 이곳에서 종을 치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고, 결혼 적령기의 처녀가 그날 종을 치면 그 해 안에 결혼을 하게 된다고 전해온다.

벨라의 탑에 올라 그라나다 시가지를 굽어보면서 '드디어 그라나다를 보게 됐구나'하는 생각을 해볼 짬도 없어 후드득 비가 떨어진다. 발을 놓을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해진 계단을 뛰듯이 내려왔지만,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다. 조현진 가이드의 안내로 카를로스5세 궁전으로 일단 비를 피했다. 조현진 가이드의 뛰어난 상황판단과 대처능력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한 일행들을 위해 비닐로 된 비옷을 사러 뛰어갔다. 그리고 비옷으로 채비를 마친 일행을 안내해 헤네랄리페로 향했다.

아랍어로 '젖과 꿀이 흐른다'라는 뜻을 가진 '헤네랄리페(El Generalife)'는 아람브라 궁전의 여름별장이다. 여름별장이라는 말처럼 일 년 가운데 초여름이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다. 왕가의 농장과 과수원, 방대한 목초지 그리고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목초지는 말들의 방목장, 가축사육장 혹은 술탄의 사냥터였다고 한다.

지역이 방대한 만큼 여러 곳으로 드나들 수 있지만, 알람브라궁전을 찾는 사람들은 1862년 이사벨2세의 방문을 기념해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숲 사이로 난 가로수길이다. 대패로 깍아낸 듯 반듯한 가루수의 벽은 빗방울이 튕겨 나올 것만 같다. 이렇게 나무를 다듬는 조경방식은 파리의 에펠탑 아래 광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는 나무들이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너무 아름다워서인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통 들지 않는다. 이슬람의 조경술이 파리로 전해진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배워가지 못한 모양이다.
헤네랄리페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왕궁이라기보다는 시골농장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말에서 내리는 장소인 하마의 안뜰을 지나 수로의 안뜰(아세키아, Acequia)에 들어서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서쪽에 서있는 망루로 행하는 아치형의 회랑이 양쪽으로 이어진다. 아세키아의 중앙에는 좁고 긴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고 수로 양편으로 늘어선 분수의 노즐에서 솟아오르는 분수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수로에 떨어지고 있다. 수로의 양쪽으로는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어우러진 정원이 이어진다.

아세키아의 환상적인 모습을 담기 위하여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아름다운 정경을 마음에 남기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모델로 삼아 이곳에 다녀갔다는 인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어서이다. 인증샷에 대한 탐욕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유럽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진을 찍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 밀고 들어서는 버릇도 꼭 같다.

모델 흉내내기 바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행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새삼 되새겨본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그저 카메라를 들이대고 대충 구도를 맞춰 셔터를 누르고서 '끝!'한다면 그곳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존 러스킨이나 알랭 드 보통은, 찬찬히 감상하고 특징을 끌어내어 그림으로 남기거나, 나아가 느낀 바를 꼼꼼하게 챙겨 글로 남겨두면 그곳에 대한 기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그나마 찍는 내가 주체가 된다면 풍경을 감상할 짬이 조금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에 찍히는 쪽을 택한다면, 사진을 찍어주는 누군가에 의하여 나는 그저 풍경의 일부로 남고 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풍경을 등지고 서있기 때문에 풍경밖에 머무는 객체에 불과하다.

대니얼 클라인은 '자신을 객체로 취급하지 말라'는 사르트르의 경고를 인용하면서, "자신을 객체로 취급하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적어지고 자신의 참모습도 적어진다. 본질적으로 지각이 없는 사람이라 분별력을 갖추려고 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의 틀에 갇혀 있게 된다."라고 경고했다. 굳이 인증샷에 목매다는 사람을 본질적으로 지각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해야겠다.
수로의 안뜰은 본래 서쪽 망루를 제외하고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전형적인 이슬람 분위기로 조성됐지만, 나스르왕조가 멸망한 다음 개조돼 그라나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역할이 바꼈다. 회랑과 망루에서 보면 알람브라 궁전 너머로 그라나다가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로의 안뜰의 끝에는 제왕의 홀이 있다. 모카라베스 장식의 아름다운 주두와 벽감들이 볼만하다.

이곳을 지나면 위쪽의 정원으로 들어서게 된다. 수로의 안뜰과는 달리 중앙에 수목으로 조성된 공간과 분수가 수로로 둘러져 있고, 그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다. 건너편으로는 굵직한 고목이 기울어져 축대에 묶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왕비와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귀족과의 외도를 목격하였다는 죄목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의 나무이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것도 벌써 수백 년도 넘었을 터인데, 당시의 나무라면 이미 가루가 되어 흩어졌을 터. 고목이라고는 해도 멀쩡하게 서있는 모습이 수상하다. 그렇다고 해도 말 못하는 수목에게까지 죄를 물은 것을 보면 추악한 정치적 속셈이 숨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단체여행이라서 서너 시간 만에 알람브라궁전에서 보아야 할 대표적 유적 다섯 곳을 모두 돌아본 셈이다. 그저 조형진 가이드를 놓칠세라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무엇을 보고 무엇을 건너뛰는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지만, 이 글에 곁들일 사진을 고르기 위하여 살펴보니 보아야 할 것들은 대충 챙겨 본 셈이었다.
알람브라궁전을 돌아보고 숙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조금 남는 시간을 이용해 구시가지에서 자유 시간을 가졌다. 왠지 어수선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름인 구시가지는 의외로 깔끔하면서도 자동차보다는 사람중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앙으로 3차선 정도의 보도가 있고 그 좌우로 각각 1차선씩 자동차도를 냈지만 차량통행은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가이드를 따라 그라나다 대성당까지 걸어갔다.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군밤을 파는 노점상이 눈길을 끌었다. 10월이면 군밤이 이르지 않나 싶다. 막상 군밤은 우리 것과 다소 차이가 있어서 씹는 순간 입안의 물기가 모두 사라진 듯 입안에 바짝 달라붙어 물이라도 마셔야 넘어갈 것 같다. 어떻든 구수한 맛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이국적 군밤이었다. 역시 군밤은 눈 내리는 겨울밤에 먹어야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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