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해부학

인제의대 3학년 김성재
발행날짜: 2025-02-17 05:00:00
  •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3학년 김성재
    투비닥터 홍보팀장

2024년 노벨문학상 시상식, 한강은 말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그녀는 청중에게 질문했고, 세계에 질문했고, 자신에게 질문했다.

그 문제는 내게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미스터리였기에 나 또한 답해보려 애썼다. 개인적으로 그 모순을 가장 편안하게 납득시켜주는 논리는 현상을 생물학적인 원칙에 대입하는 것이었다. 유전자와 본능의 세계에서는 윤리와 법 역시 인간이 안정된 사회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도구에 불과해진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개념조차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일 뿐, 인간은 누구나 본인의 정신적 안녕을 위해 살아간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삶에 임하려 해왔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질문이 쉽게 해결될 리가 만무했다. 생각과 달리 현실은 문제를 어렵게만 만들었던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병리적 현상으로 처벌보다는 치료의 대상에 가깝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데도 수십 명을 무자비하게 살인하고 쾌락을 느꼈다고 진술한 범죄자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가? 어째서 그를 악으로 규정하고 싶은가?

이러한 물음의 연쇄는 최근 나의 일상을 흔들었던 거취 문제와 뒤섞이며 진통을 야기했다. 학교로부터 휴학을 모두 소진한 사람은 제적 대상이니 복학하라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예과 2학년을 마치고 1년의 휴학계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은 전교생 600여 명을 통틀어 50명 정도였는데, 각자의 사정이나 학적 상태는 모두 달랐다.

우리는 난생처음 보는 학칙도 들여다보며 매일 논의했지만 어째서인지 학칙은 한없이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제적이라는 단어가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유급과 등록금은 그에 비하면 작은 문제였다.

더 많은 것을 걸고 투쟁하는 전공의 선배들이나 24학번 등을 생각했을 때 어떻게든 투쟁에 참여하겠다는 이도 있었고, 토사구팽 당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호책이 없다면 두렵다는 이도 있었다. 내부의 통일된 결론은 없었고, TF의 가이드라인은 '휴학 가능자는 휴학, 휴학 불가능자는 수업 거부'였다.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은 꾸준히 TF에 보호책을 강구했다. TF는 제적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실명투표를 진행했고, 나를 비롯한 90% 정도가 수업 거부를 결정했다. 동시에 의대생과 의사를 위한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인제대 휴학 불가자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되었다. 부모님의 안부를 묻거나, 언젠가 만나면 꼭 기억해주겠다는 훈훈한 그림이 연출되었다. 지인의 실명이 업로드되었다. 수업 거부에 투표한 친구였다.

옳고 그름이 없다고 믿는 이라면 당연히 수업 거부를 택한 자, 복학을 선택한 자, 비난하는 자 모두가 각자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인식해야만 했다. 모두가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이토록 폭력적인 비난을 퍼붓는 사람도 대의를 위한 투쟁의 독전대이자 선봉장이었을 것이며,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가족이자 연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이탈자를 아니꼽게 보았던 나의 과거도 합리화해주는 최선의 선택임이 틀림없었다.

결국 인제대 휴학 불가능자의 99%가 수업 거부를 선택했고, 익명 커뮤니티에는 퍼부었던 비난에 대한 사과와 거칠게 행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게시글이 업로드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 글을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깊이 납득하기가 어려웠던가? 어째서 나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데도 그다지도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가?

이 글은 그런 질문들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실마리를 풀기위해 기억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시선을 향해있을 필요가 없었다.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의 삶 역시 빈번히 선악이 겹쳐진 형태였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분노의, 누군가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다만 내장에서 죄와 영광이 동시에 흘러나오는 현상은 건강에 이롭지 않았다. 선과 악이 치덕치덕 달라붙어 끔찍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유달리 깊게 시달렸기에 치료는 오래 걸렸지만 끝내 성공했다.

이후로는 행복만을 위해 모든 것을 즐겁고 가볍게 여기며 살고있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은 족쇄가 되어 이토록 자유롭게 나아가는 삶을 저해할 것만 같았고, 실제로 그런 상념이 몹시 괴롭히던 적을 떠올리며, 고민하지 않기 위해 단순하면서도 나를 합리화 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었다.

매일같이 선악의 저울을 들이미는 세상에서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늑한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이 뚜렷하게 구분되는가? 그 또한 아늑한 결론일 것이다.

결국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을 멈추려면 본인이 납득할 수 있어야만 했다. 납득 없는 아늑함 속에서는 불협화음만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다. 처음 모순의 누더기 같은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걸렸던 인고의 시간을. 어떤 법칙보다 복잡하고 회색보다도 회색지대에 있는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의 세계이기에 해부하고 고뇌한 끝에 겨우 납득하고 나아갈 수 있었다. 오직 그 고민의 시간만이 치료였다는 것을,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다.

공교롭게도 마침 읽고 있던 《데미안》이 더욱 바람을 불어주었다. 등장인물 데미안은 시대의 진리라고 여겨지던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펼치는데,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진정한 강자라고 여기거나, 예수를 보고 회개한 도둑보다 도망친 도둑을 예찬하는 등, 주인공 싱클레어가 알고 있었던 세계와 윤리관을 뒤흔든다. 그리고는 어느 날 편지를 한 통 보낸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부숴야 한다"

더욱 치밀한 구성과 메시지가 있는 소설이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안내하는 데미안과, 그에 따라 끊임없이 세계를 탐구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이었다. 싱클레어는 끝내 나아가는데 성공한다. 그가 세계를 부수고 나와 자아를 가득 채울 수 있던 까닭은 안주하지 않는 용기와 헤맬지라도 길을 찾아가려는 태도에 있었다.

《데미안》은 결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알을 깨기 위한 투쟁으로 묘사하며 전쟁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데미안》 그 스스로가 카인의 이야기나 도둑에 대한 일화처럼 옳고 그름에 대한 물음을 남김으로 인해 메시지가 더욱 완성된 듯 느껴졌다. 전쟁을 새로운 세계를 향한 과정으로 묘사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삶은 뉴스나 익명 커뮤니티뿐 아니라 소설에서까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물어댄다. 미천한 견문을 가진 나에게 살인마에 대한 선악 규정과 익명 커뮤니티에 대한 납득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정답이 존재하지도 않지만, 멈춰서는 안된다.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만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택하고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한강은 자신의 질문에 답했다. "오래 전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을 꿰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글쓰기, 고뇌, 경험…그 도구가 무엇이든, 나아가려는 자는 세계를 해부하는 행위를 멈춰서는 안 된다. 설령 해답이 없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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