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관동의대 본과 4학년 안하은

살다 보면 유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화려한 말주변이 있는 것도, 대단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아닌데, 그저 같은 공간에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배려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들.
그들의 다정함은 몸에 밴 습관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가끔은 '저런 따뜻함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재능이 아닐까?'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본래 갈등을 피하고 둥글게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편이다. 하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온함과, 사람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부터 녹여내는 능동적인 다정함은 분명 결이 다르다는 걸 요즘 들어 실감하고 있다.
다정함은 단순히 착하고 순한 성품을 넘어서, 때로는 벼랑 끝에 선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었던 단단한 벽을 허무는 것은 누군가가 대가 없이 건넨 진심 어린 따뜻함이었다.
가정의학과 실습을 하며 마주한 호스피스 병동은 조용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낮은 기계음 속에서, 환자분들의 표정에는 말로 다 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늘 서려 있었다. 회복을 기다리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곳이었기에, 비관과 우울이 병실 공기처럼 깔려 있는 날들이 많았다.
어느 날 회진 중, 말수가 없이 창밖만 바라보시던 환자분이 눈에 걸렸다. 교수님은 차트를 확인하다가 잠시 멈추더니, 환자분 곁에서 눈을 맞추며 조용히 여쭤보셨다. "요즘 마음은 좀 어떠세요?" 병세가 아닌 마음을 묻는 한마디였다.
환자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을 끄덕이셨고, 교수님은 서두르지 않고 환자분의 손을 잡으며 힘드신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가족분들과 의료진 모두가 환자분의 아픔을 덜어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힘든 마음을 충분히 이야기해달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환자분은 옅게 웃으셨다. 거창한 처방도, 특별한 해결책도 아니지만 다정한 한마디에 엷게 떠오른 미소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회진을 돌며 잔뜩 긴장한 환자의 눈을 한 번 더 다정하게 맞추는 일, 차가운 청진기를 손으로 데워 건네는 작은 배려, 쏟아지는 의학 용어 앞에서 불안해하는 보호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이는 여유. 이런 사소한 온기들이 병동에 스며들 때 환자는 자신이 병원 시스템 속 하나의 케이스가 아니라 존중받는 사람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감각은 환자에게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아주 큰 위로와 회복의 용기가 된다. 때로는 백 마디의 유창한 의학적 설명보다, 환자의 손을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며 건네는 다정함이 마음의 문을 여는 치료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다정함은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 타고나는 것일까?' 비록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부분도 있겠지만, 치열한 노력과 고민으로 빚어낼 수 있는 후천적인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성격이 타고나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내 앞의 사람이 겪고 있을 고통의 무게를 짐작해 보려는 노력, 그리고 기꺼이 내 시간과 에너지를 타인에게 내어주려는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정함은 저절로 피어나는 들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꾸어야 하는 정원과 같다.
방대한 학업과 쉴 틈 없는 실습 속에서 여유를 잃고 무뎌질 때도 분명 많다. 몸이 지치면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 타인을 향한 시선도 덩달아 딱딱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얼어붙었던 내 마음을 녹여주고 다시 일어서게 했던, 그 다정했던 사람들의 온기를 기억한다. 환자의 아픔을 매일 반복되는 일로 치부하여 무뎌지지 않도록, 사람을 향한 애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도록 깨어 있고 싶다.
완벽하게 타고난 다정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따뜻한 온도를 품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애쓰는 것. 타인의 고통 앞에서 결코 냉소적이거나 무감각해지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그것이 예비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노력이 아닐까.
훗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가 나와 대화를 나누고 문을 나설 때, 그 마음의 온도가 단 1도라도 올라갈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의사로서 행복한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다정함, 그 조용하지만 위대한 힘을 매일 진료실에서 실천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내 마음의 온도를 올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