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과학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1학년 박희주

"그렇게 오래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데 왜 그만두려고 해? 나이가 몇 살인데 빨리 자리 잡아야지"
스물다섯의 내가 진로를 두고 고민하던 시기에 자주 들었던 말이다. 물론 열여덟의 나는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갖게 되면 진로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럽게 끝날 줄만 알았다. 인생에는 어느 순간 '정답'에 도착하는 때가 있고, 그 이후에는 그 길을 성실히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사회에 나와보니 그렇지 않았다.
인생의 방향은 생각보다 자주, 출발한 뒤에야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대학을 졸업한 뒤 괜찮은 직장에 바로 취업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제 그 길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고 자리를 잡아가면 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의사가 되고 싶었다. 병원 안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일뿐만 아니라, 더 넓은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해외의 의료현장을 경험하고, 의료봉사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곳에 직접 가보고 싶었다.
진료실에서 품게 된 질문을 연구로 이어가 새로운 의학적 근거를 창출하는 일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임상과 연구, 교육을 오가며 내가 배운 의학을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응원보다는 우려를 건넸다.
"이제는 새로운 걸 시작할 때가 아니라, 사회에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조차 불확실함 속에서 직장생활과 입시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던 터라, 타인의 걱정은 때때로 조언보다 판결처럼 들렸다.
내가 너무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괜한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아닐까. 분명 내가 선택한 길인데도 어느 순간에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도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이 꿈을 내려놓는다면, 남은 평생 그 선택을 아쉬워하며 살 것만 같았다. 하루 서너 시간을 자며 출근 전과 퇴근 후의 시간을 쪼개 시험공부를 했다.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른 날에도 시험이 끝나자마자 당직근무를 하러 달려갔고, 최종 합격자 발표 역시 당직을 마친 뒤 비몽사몽한 채로 확인했다.
그렇게 버텨낸 시간 끝에, 나는 결국 바라던 의학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길에 들어선 뒤에도 그 과정에서 느꼈던 불안은 오래 남았다. 돌이켜보면 나를 가장 지치게 한 것은 잠이 부족한 날들보다, 남들이 정해둔 기준에 맞서 내 선택을 끊임없이 변호해야 했던 일, 그리고 실패하면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막막함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두고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주변의 시선 때문에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청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몇 번이나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던 만큼, 스스로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일이 단지 개인의 용기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짊어져야 하는 선택 앞에서, 용기는 쉽게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올해 송파청년정책연구단 공저자로서 책을 쓰게 될 기회를 얻었다. 처음에는 '청년정책'이라는 단어가 제법 거창하게 느껴졌다. 정책이라면 통계와 제도를 먼저 공부하고 그럴듯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첫 단계는 뜻밖에도 멀리 있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오며 직접 느낀 불편과 고민을 꺼내놓는 일이었다.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질문해야 했다.
나는 어떤 순간에 어려움을 느꼈는가.그 어려움은 정말 나만의 일이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몇 년 전의 내가 다시 떠올랐다. 안정적인 길을 두고 왜 다시 시작하느냐는 말을 들으며, 내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던 스물다섯의 나였다.
그래서 나는 내 경험과 가장 맞닿아 있는 '진로 전환'을 주제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을 위한 지원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년이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그 고민을 받아줄 제도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취업과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여러 지원책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한 번 선택한 길을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간은 정책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전환기'라 이름 붙였다.
어쩌면 그 공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진로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이미 무언가를 이루어 낸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다시 공부할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고, 익숙한 분야를 벗어나 낯선 세계의 정보를 처음부터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이미 가진 것을 내려놓으려는 선택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로를 바꾸려는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고민과 전환의 과정을 함께 지탱해 줄 사회적 기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고민은 '송파 청년 리스타트 패스'라는 정책 제안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역량을 새로운 진로에 연결할 수 있도록 돕는 온라인 진로 전환 멘토링, 재교육과 자격 취득에 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바우처, 비슷한 고민을 거쳐 먼저 새로운 길에 들어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지원하는 경험자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중요한 것은 청년들에게 무조건 새로운 길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결정이 스스로의 신념과 가치에 따른 것이라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사회의 조건을 함께 바꾸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정책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역할이다.
내 이름이 들어간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물으며 그저 버티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그 경험은 글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으며,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 방법을 고민하는 하나의 정책제안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은 생각보다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평균수명은 길어지고, 산업과 직업의 변화 속도는 빨라졌다. 앞으로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직업만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점점 더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직업의 연속성이 아니라 신념의 연속성일지도 모른다. 하는 일은 바뀌더라도,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지는 스스로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외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얼마나 남들의 기대에 부합하는지가 아니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에 있다. 나 역시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모두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선택의 기준만큼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의사가 되기 위한 여로 위에 서 있다. 이 길에서도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고, 언젠가 "왜 굳이 그 길이냐"는 말을 다시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물다섯의 나를 떠올리려 한다.
타인의 걱정이 판결처럼 들리던 그 때에도 끝내 나를 움직인 것은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였다는 것을.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만큼, 이제는 다른 이들의 선택 앞에서도 판결보다는 응원을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익숙한 길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도, 새로운 길을 향해 다시 출발하는 사람도, 그 선택이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면 서로의 용기를 깎아내리기보다는 가능성을 함께 바라봐 주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