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회의 이정표…소통과 통합의 시대로

가정의학과의사회 경문배 총무이사
발행날짜: 2026-06-08 05:00:00
  • 대한가정의학과의사회 경문배 총무이사

가정의학과의사회 경문배 총무이사

대한민국 의료 체계가 유례없는 폭풍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의대 정원 증원 사태가 남긴 상흔은 깊고, 정부의 일방적인 의료정책과 표심만을 의식한 정치권의 포퓰리즘은 의료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이 거대한 위기 앞에서 대한의사협회를 필두로 한 직역 및 지역 의사회는 지금, 존재의 이유와 미래의 역량을 근본적으로 질문받는 역사적 시험대에 서 있다.

국민의 인식은 높아졌고 정보는 범람하며, 의사를 존경의 대상이 아닌 단순한 '서비스직'으로 치부하는 경향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국가 공권력은 비대해지고 사회 전반이 하향 평준화되는 압박 속에서, 우리 의사회는 과연 어떤 역량을 갖추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주체적 이정표를 세워야 할 시점이다.

안팎으로 마주한 연대의 균열과 역량의 한계! 현실을 진단해보자!

1) 의사 노조에 대한 고민과 파업의 딜레마

최근 버스노조나 삼성전자 노조 등 사회 각계의 파업을 지켜보며 '의사 노조'의 필요성과 역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노동3권을 무기로 한 일반 노조의 방식을 의사사회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의사에게는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책무와 환자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숭고한 사명감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정부와 대항할 때 '파업'이라는 극단적 수단은 양날의 검이다. 파업은 필연적으로 국민의 원성을 부르고 의사와 환자 사이를 갈라놓으며, 공권력의 압박 속에 자칫 무고한 회원들이 다치고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국민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회원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투쟁 방식은 이제 그 실효성과 한계를 냉정하게 되짚어봐야 한다.

2) 내부의 치명적 약점 : 세대 간 불신과 25개 전문과의 이질감

현재 의사회 조직에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내부의 분열이다. 의대 정원 사태를 겪으며 거대한 패배감과 상처를 입은 젊은 의사(전공의·의대생) 세대와 기성 의사회 간의 불신은 향후 미래를 가로막는 무거운 숙제다. 선배 세대가 젊은이들의 절망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의사회의 미래는 없다.

여기에 더해, 25개 전문과라는 구조적 이질감 역시 내부 결속을 해치는 고질적인 원인이다. 각 과의 이해관계와 수가 구조가 다르다 보니 대정부 협상이나 정책 수립 시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각자도생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이질감 속에서 어떻게 통합된 협의를 이끌어낼 것인가는 의사회가 시급히 풀어야 할 방정식이다.

3) 타 의료인 단체 대비 취약한 정치적 역량과 대관 능력

우리는 뼈아픈 실책을 인정해야 한다.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등 타 의료인 단체들에 비해 의사회의 대관 능력은 현저히 부족하다. 정관계에 뻗어 있는 정치적 뿌리가 빈약하고, 정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목소리를 내줄 의사 출신 정치인의 부재는 매번 대관 협상에서 의료계를 고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의학적 정당성만 외칠 뿐, 이를 제도화하고 정치적으로 관철하는 세련된 역량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소통·통합·집단지성으로 여는 새로운 미래의 방향성을 세우자!

이 사면초가의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대한의사협회와 직역·지역 의사회는 과거의 투쟁 문법에서 벗어나 '소통과 통합의 아이콘'으로 거듭나야 한다.

1) 회원들의 집단지성과 헌신적인 소수 리더십의 조화

현실적으로 모든 회원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상시로 끌어올리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명예욕에 눈먼 리더가 아니다. 오직 회원과 의료계의 올바른 가치관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희생적이고 훌륭한 소수의 리더'가 앞장서서 회원들을 이끌어 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개인의 영달이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회원들을 속이고 내부 분열을 야기하는 야합형 리더들이다. 리더들의 허황된 환상을 깨부수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감시하는 힘은 오직 '회원들의 깨어있는 집단지성'에서 나온다. 집단지성이 살아 숨 쉬는 의사회만이 건강한 리더십을 길러낼 수 있다.

2) 후배들을 위한 배려와 세대 간·전문과 간 통합 창구 구축

의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대 간 갈등을 치유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어야 한다. 기성세대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미래의 주역인 후배들에게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며 자리를 물려주는 배려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젊은 의사들이 의사회 조직 안에서 효능감을 느끼고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

또한, 25개 전문과의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해 각과회장단모임을 활성화해야 한다. 특정 과의 이익이 아닌, 전체 의료계의 공존을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짜고 상호 양보와 조율을 이끌어내는 내부 조정자로서의 역량이 직역 및 지역 의사회의 핵심 역할이 되어야 한다.

3) 환자와 국민의 인심을 얻는 역량 발휘

국민의 인심을 얻지 못하는 의사회는 고립된 섬에 불과하다. 의사를 서비스직으로 치부하는 서글픈 세태 속에서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유일한 가치는 바로 환자의 '건강과 생명'이다.

의사회는 국민을 설득의 대상이나 적대적 관계로 보지 말고, 우리의 가장 강력한 우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결국 국민의 건강권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대중의 언어로 소통하고, 지역 사회와 환자 곁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모습을 통해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의사회의 목소리야말로, 비대해진 공권력과 포퓰리즘 정치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강력한 역량이 될 것이다.

'건강'이라는 오롯한 가치로 정의를 실현하다!

사회 전반이 경제적 양극화와 가치관의 하향평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때, 의사들마저 이 흐름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롯이 '건강'이라는 숭고한 가치 하나만으로도 사회의 올바른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집단이다.

대한의사협회와 전국의 직역·지역 의사회가 사욕 없는 리더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후배들을 배려하며, 회원들의 집단지성으로 내부를 채워나갈 때 우리의 역량은 배가될 것이다. 국민의 마음을 얻고 대한민국 의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당당한 주역으로서, 직역 및 지역 의사회가 새로운 소통과 통합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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