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ltimes

태그로 보는 뉴스

언어 (Language)

서툴러지는 연습

조선대 의대 예과 2학년 김세영
발행날짜: 2026-09-07 05:00:00
  •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예과 2학년 김세영

"이번 숙제는 보고서 A4 한 장 분량으로 써오는 거야"

"느낀 점을 3000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학창 시절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말들이다.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 생각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면 정말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게 글쓰기는 좀처럼 정복할 수 없는 큰 산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글로 멋지게 표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늘 부러웠다. 적절한 단어를 골라내고, 흠잡을 곳 없는 논리를 막힘없이 풀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감마저 들었다.

그러던 중 내게 AI가 나타났다.

AI의 첫인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아마 '구원자'라고 답할 것이다. 처음 GPT를 사용했을 때의 경험은 신세계에 가까웠다. 잡다한 일을 대신해주는 것도 신기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따로 있었다. 내가 미처 말로 만들지 못한 생각과 감정을, 나보다 훨씬 정확한 문장으로 만들어준다는 것.

머릿속에 애매하게 떠다니던 생각을 아무렇게나 털어놓으면 AI는 금세 앞뒤를 맞춰주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생각과 자료를 정리하지 않은 채 대화하듯 쏟아낸 뒤, 초안을 요청한다. AI가 글의 형태를 잡아주면, 그때부터 나는 그 글을 다듬는 일만 하면 된다. 문단을 옮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을 바꾸고, 논리가 비는 곳에는 문장을 덧붙인다.

AI라는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쥔 나는 점점 무서울 게 없어졌다. 3000자가 넘는 글도 전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었고, 혼자였다면 한참 붙들고 있었을 생각도 매끄러운 문장으로 금방 꺼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다.

이걸 정말 내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고민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생각은 내 것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만 분명하다면,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옮길지는 부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감 덕분이었을까. 나는 조금 무모한 마음으로 투비닥터 매거진의 기획기사 작성에 참여했다. 처음 맡은 글은 여러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해 전달하는 글이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자료를 열심히 찾은 뒤 AI에게 넘겼고, 받은 초안을 몇 시간씩 고쳤다.

완성된 글은 분명 매끄러웠다. 특별히 이상한 문장도 없었고 흐름도 그럴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다.

자료를 조사할 때는 분명 흥미로웠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갈 때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고, 자료 사이에서 연결들을 찾아내는 과정도 즐거웠다. 그런데 정작 완성된 글에서는 그때의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팀원들에게 처음 받은 피드백도 비슷했다.

"전체적으로 매끄러운데, 조사한 자료만큼 재미있지 않아요"

이번 칼럼을 준비할 때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읽는 글로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신경을 썼다. 너무 주저리주저리하지 않게, 지나치게 사적으로 보이지 않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읽기 편한 글을 쓰고 싶었다.

내 생각을 AI에 거의 전부 털어놓았다. 함께 구조를 짜고, 문장 하나를 두고 수십 가지 표현을 만들었다. 그렇게 다듬는 동안 글은 점차 형태를 갖춰갔고, 어떤 문장은 내가 혼자서는 떠올리지 못했을 만큼 선명했다.

그런데 며칠을 통째로 고민해도 글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분명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담겨 있었는데, 내가 쓴 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생각과 꼭 닮은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내가 유일하게 오롯이 혼자 쓰는 글을 떠올렸다. 바로 가끔 쓰는 '일기'다.

일기는 오래 걸린다. 몇 줄 쓰지 않았는데도 한참 같은 문장 앞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어렴풋이 알겠는데, 막상 적으려 하면 알맞은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가도 결국 마음에 들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붙들고 있다 보면, 내 글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 이것밖에 못 쓰지.''더 멋진 표현은 없나.''너무 투박한데'

당장이라도 전부 복사해서 AI에게 붙여넣고, 말끔한 문장으로 바꿔버리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유치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빙빙 돌아가는데도 그 안에서는 '내'가 느껴졌다.

같은 내 생각인데, 왜 서툴게 쓴 일기는 나처럼 느껴지고 더 잘 표현된 글은 그렇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번 글은 다르게 써보기로 했다. 몇 번이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부족하지만 내 힘으로 글을 만들어갔다.

혼자 써보니 처음에는 어색함투성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러웠던 말도 글로 옮기면 어딘가 어설펐고,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거나 문장과 문장 사이가 잘 이어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을 고치고, 더 맞는 단어를 찾고, 문장을 다시 써보는 데 한참을 썼다. 그런데 그렇게 문장을 붙들고 있는 동안, 처음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질문들이 하나둘 생겼다. 같은 생각도 다른 방향에서 다시 보게 되었고,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할수록 막연했던 생각도 조금씩 깊어졌다.

어쩌면 표현은 생각이 끝난 뒤 붙이는 포장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 '서툰 시간' 동안, 나는 나만의 생각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비로소 문장들은 조금씩 내 것이 되어갔다.

예전에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이유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내가 부러워했던 건 정말 근사한 단어나 흠잡을 데 없는 논리뿐이었을까.

저 사람은 저 문장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고민했을까. 얼마나 많이 고치고, 틀리고, 다시 생각했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바로 그 시간을 너무 빠르게 끝내고 있었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들을 AI에게 늘어놓으면 금세 그럴듯한 문장이 되었다. 막막함은 줄었고, 분명 편해졌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빨리 없애버렸던 막막함을 다시 떠올린다.

아마 이 글을 다 쓴 뒤에도 나는 다시 AI를 켤 것이다. 여전히 내가 하지 못한 말을 정확하게 찾아주는 순간을 좋아하고, 혼자서는 발견하지 못한 표현의 빈틈도 자주 들여다볼 것이다.

다만 이제는 AI에게 무언가를 묻기 전, 조금 더 오래 서툴러보고 싶다. 좋은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오랫동안 커서를 깜빡여보기도 하고, 생각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며칠쯤 가지고 있어보고 싶다.

잘 모르겠는 마음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문장도 잠시 그대로 두어보고 싶다.
그렇게 다시, 서툰 사람이 되고 싶다.

관련기사

오피니언 기사

댓글

댓글운영규칙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더보기
약관을 동의해주세요.
닫기
댓글운영규칙
댓글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으며 전체 아이디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