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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공백 속 위태로운 사다리…민간 지원이 남긴 숙제

발행날짜: 2026-09-14 05:30:00
  • 가뭄의 단비 EAP가 가진 양면성과 명확한 한계
    "임상현장 허점 메울 고민 필요…제약사만의 부담 아니다"

[메디칼타임즈=문성호 기자]식품의약품안전처의 정식 허가를 획득했음에도 건강보험 등재라는 거대한 문턱을 넘지 못한 초고가 신약들. 당장 약값을 감당할 수 없는 중증 환자들에게 정부가 건네는 실질적인 공적 지원은 요원하다.

이 거대한 제도의 공백 속에서 임상시험에 더해 환자들과 가족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의존하는 두 번째 민간 사다리가 바로 제약사 주도의 '환자 지원 프로그램(EAP·Patient Support Program 등)'이다.

약값을 일부 또는 전액 지원받아 생명의 연장선을 잇는 이 프로그램은 환자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동아줄과 같은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

사다리 뒤에 숨겨진 민간 지원 한계와 불확실성

허가 후 급여 등재 전까지 환자들에게 약을 무상 혹은 할인 공급하는 지원 프로그램은 언뜻 인도주의적 제도로 보이지만, 제도의 법적 테두리 바깥에서 민간 기업의 자율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구조적인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건강보험 중심인 국내 임상현장 시장을 고려했을 때 제약사 입장에서는 EAP를 통해 먼저 시장에 안착하는 동시에 향후 급여 적용 시 안정적인 시장확보를 목적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상현장 전문가들은 환자 지원 프로그램이 지닌 가장 큰 딜레마로 '지속성의 불확실성'을 꼽는다. 제약사의 글로벌 임상 전략 변화나 국내 약가 협상 지연 등의 변수가 발생할 경우 제약사는 언제든 프로그램을 축소하거나 중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혈액을 포함한 항암제와 희귀질환 영역에서 도입된 환자지원 프로그램(PAP)은 환자들에게 마지막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이러한 환자 프로그램은 약가 협상 결렬이나 제도의 벽 앞에서 언제든 신뢰를 잃을 수 있는 위태로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최근 도입된 대표적인 신약 환자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구조적 딜레마가 명확히 드러난다.

한국얀센의 폐암 치료제 '리브리반트(아미반타맙)'의 경우 지난해 허가 받은 적응증(Exon 20ins 1차, EGFR 1차 및 2차 등)에 대해 PAP을 통해 지원을 한 바 있다. 첫 12바이알까지는 약가의 72%를 지원하지만, 이후 13바이알부터는 지원율이 약가의 20%로 급감하는 구조다. 언제 건강보험 급여가 될지 기약 없는 상황에서 환자들이 투약을 지속할수록 경제적 부담이 불어나는 셈이다.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전, 후 신약 접근 경로 비교표.

여기에 최근 바이엘코리아의 전립선암 치료제 '뉴베카(다로루타마이드)'의 사례는 이러한 민간 사다리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뉴베카는 지난해 말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암질환심의위원회에서 급여기준 설정에 성공, 올해 3월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급여 적정성을 조건부로 인정받아 논의 궤도에 올랐으나, 약가 협상 과정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국 제약사가 자진 철회를 신청했다.

특히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혈액암협회 등을 통해 환자들에게 약제를 지원해 오던 환자 프로그램마저 협상 결렬과 함께 지난 7월 1일부로 전면 중단됐다. 기존 지원을 받아 투여받던 환자는 유지하는 한편, 신규 환자는 받지 않기로 한 것인데, 최근 혈액암협회가 해당 사실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정부의 급여권 진입을 기대하며 버텨온 환자들은 협상 결렬과 동시에 지원 중단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급여를 기대하며 프로그램을 도입한 바이엘코리아도 추가적인 운영은 어려운 측면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임상현장에서는 이를 두고 제약사의 의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전반적인 우리나라 체계상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국립암센터 한지연 교수(종양내과)는 "그것은 제약사의 공통적인 문제점(운영의 한계)이라고 볼 수 있다"며 "제약사가 PAP를 운영하는 이유가 퍼블리시티 등에 기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혜택을 주는 것이지만, 이를 전부 제약사의 의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제약사 내부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 민간 사다리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지 명확해진다.

글로벌 제약사 환자 프로그램 담당자는 "환자 목소리가 커지면서 관련 롤이 생겨나고는 있으나, 실상은 정립된 표준운영절차(SOP)나 충분한 예산조차 없이 만들어가는 초기 단계"라며 "특히 헬스케어 업계 특유의 엄격한 컴플라이언스 규제에 묶여 허가 전 신약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실질적인 약제 지원을 투명하게 안내하는 것조차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고 귀띔했다.

개별 제약사의 자율적 판단과 컴플라이언스 기준에 휘둘리다 보니 기업 경영 상황이나 약가 협상 결과에 따라 프로그램이 예고 없이 사라질 위험이 상존한다.

처방 벽에 가로막힌 의료진과 공적 안전망 구축

이러한 제도의 공백 속에서 환자를 직접 마주하는 일선 의료진 역시 깊은 무력감과 윤리적 갈등에 시달린다.

임상현장에서는 새로운 혁신 치료 옵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문학적인 비용 장벽 때문에 선뜻 처방이나 권유를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일상이 됐다. 검사 결과와 함께 치료 방향을 설정하는 업무에 더해 환자의 전반적인 경제적인 상황도 모니터링해야 하는 셈이다.

임상현장 의료진들은 혁신 치료 옵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비용 장벽 때문에 선뜻 처방이나 권유를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일상이 됐다.

경기도의 한 상급종합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신약 이야기를 꺼낼 때 주치의로서 고민을 정말 많이 한다"며 "환자에게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하는 것 만으로도 충격인데, '약이 있는데 얼마입니다'라고 하는 순간은 가족들의 가슴에 한 번 더 칼을 찌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환자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거나 기약 없는 희망을 품더라도 여전히 남는 경제적 부담과 언제 끊길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치료제가 있어도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환자가 겪을 파탄과 절망감을 잘 알기에 주치의들조차 말을 꺼내조차 조심스럽다는 자조 섞인 탄식이다.

해외 주요 국가들은 이 같은 신약 허가와 건강보험 급여 사이의 치명적인 공백을 방치하지 않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안전망을 가동하고 있다.

일례로 영국의 경우 별도의 전용 기금(혁신 의약품 기금 등)을 조성해, 건강보험 정식 등재 전이라도 시급한 중증 환자들이 초고가 신약이나 항암 혜택을 공적 재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정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제약사의 자선적 프로그램이나 개별 협상의 변동성에 생존권을 저당 잡히지 않도록, 국가가 직접 리스크를 분산하고 사다리를 지탱하는 구조다.

대한혈액학회 다발골수종연구회 위원장을 지낸 세브란스병원 김진석 교수(혈액내과)는 "건강보험 재정과 다르게 고가 약제들을 관리하는 펀드를 만들어야 한다"며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한데 정부는 이러한 제도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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