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채우는 힘, 경험의 기회

가톨릭 관동의대 1학년 배지섭
발행날짜: 2026-06-08 05:00:00
  • 가톨릭관동대학교 본과 2학년 배지섭

경진대회 해커톤에 무작정 참가해본 당일, 나는 처음으로 내가 의대 밖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학과 팀원이 "프론트엔드에서 처리하고 API 설계는 내일 픽스하자"고 말할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제로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옆에서 다른 팀원이 "이 서비스 고객 획득 비용 대비 LTV가 말이 되냐"고 따져물을 때 나는 그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다. 준비 내내 나는 의료적 타당성만 들이밀었고, 팀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전문가가 아니라 "그래서 시장에선 어떻게 팔리냐"는 질문에 답을 못하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게 처음이었다. 내가 공부해온 것들이 특정한 울타리 바깥에서는 언어조차 되지 않는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 그 감각이 불쾌했고, 동시에 묘하게 중요한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글은 그 느낌에서 시작된 사고의 결과다.

1. 레일 위의 삶,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것들

의과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삶에는 촘촘한 일정이 깔린다. 예과 2년, 본과 4년의 커리큘럼은 대부분 미리 설계되어 있고, 학생에게 허용된 자유란 그 빡빡한 틀 안에서 어떻게 버틸 것인지를 선택하는 정도다. 나는 그 시스템에 꽤 잘 적응해왔다. 기출 패턴 분석, 시험 전날 몰아치기, 효율적인 암기법. 이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들을 나름대로 체득했다.

그런데 그 체득이 어느 순간 나를 좁게 만들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의대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가는 언어들―약물 기전, 진단 기준, 임상 가이드라인―은 병원 바깥에서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이 언어를 함께 쓰는 사람은 의사와 의대생뿐이다. 나는 이걸 불편함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4년을 살았다. 불편함을 느낄 기회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 시간 동안 교류한 사람의 절대 다수는 의대 동기, 선후배, 교수님이었다. 우리끼리는 말이 잘 통했다. 문제는 그 말이 잘 통하는 환경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도제식 교육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칼 끝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가르는 의료에서, 검증된 지식을 빈틈없이 전수하는 방식은 필수적이다. 내가 문제 삼는 건 그 방식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이다. 학생을 정답의 수신자로만 훈련시키다 보니, 정답이 없는 상황 앞에서 생각이 멈춰버리는 현상. 의대에서 공부한 나는 "심근경색 환자에게 어떤 약을 쓸 것인가"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환자가 약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보호자가 치료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이런 질문 앞에서 나는 아직 어리다. 그리고 의대 교육은 나를 이 질문 앞에 세운 적이 없다.

2. 정답이 없는 현실과의 충돌

다시 경진대회 이야기를 하자. 나는 의료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팀에 합류했다. 아이디어는 그럴듯했고,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디어 검증 단계에서 팀원이 물었다. "고객이 이걸 왜 써? 지금 뭐가 불편한데?" 나는 "의료 접근성이 낮아서요"라고 답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고객의 언어야, 아니면 너의 언어야?" 나는 그 순간 막혔다. 나는 문제를 의사의 시각으로 정의하고 있었고, 그게 실제 사용자의 불편함과 같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그 가정이 무너지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의대에서의 공부는 대부분 이미 정의된 문제를 푸는 일이다. 환자가 증상을 호소하면 나는 이를 기반으로 진단명을 추려내고, 가이드라인에 맞는 치료를 결정한다. 문제의 틀은 이미 주어져 있다. 하지만 스타트업 현장에서, 그리고 사실 의료 현장의 더 복잡한 층위에서, 문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자체가 일의 절반이다. 나는 이 단계를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그 경진대회에서 결국 입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공간에서 버티는 경험, 확신이 틀렸을 때 빠르게 방향을 트는 연습, 팀이 흔들릴 때 아무것도 확정짓지 않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게 중심을 잡는 기술―이것들은 어떤 강의에서도 배우지 못한 것들이었다. 나는 이걸 맷집이라고 부른다. 실패를 맞고도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는 근육. 의대 교육은 이 근육을 키워주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키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

3. 취지는 좋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쯤에서 제도적 해법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솔직한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일부 의대에서는 이미 의료인문학이니 융합 교육이니 하는 과목들이 운영되고 있다. 가톨릭관동대학교는 본과 교육과정 내내 의료인문학을 틈틈이 배운다. 연세대 의대의 DMH가 대표적이고, 다른 학교들에도 유사한 과목들이 있다. 취지에는 진심으로 공감한다. 의학이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니 의대 교육도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내가 그 수업을 들을 때, 솔직히 어떤 마음이었냐고 혹자가 묻는다면 말이다. 임상 과목 필기시험이 사흘 뒤이고 병리 실습 보고서 마감이 주어진 상황에서, 나는 그 의료인문학 수업에 완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주변 동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게 우리 사이에서의 통용어였다. 취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크다면, 그 과목은 학생에게 닿지 않는다. 형식만 남는다.

그렇다면 이 취지 좋은 교육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학생 입장에서,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

첫째, 경험이 먼저고 성찰은 나중이어야 한다.

지금의 인문학 과목들은 대부분 텍스트를 읽고 에세이를 쓰는 구조다. 하지만 아무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쓰는 성찰은 공허하다. 나는 스타트업 경진대회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소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쓸 말이 생겼다. 반대 순서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공학·경영학과 등 타 분야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실제 문제해결 프로젝트나 경진대회 참가를 학점으로 인정하고, 그 경험을 글로 정리하는 세미나를 성찰의 플랫폼으로 쓰는 방식이라면 다르다. 과제가 아니라 이미 겪은 일을 언어화하는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순서가 바뀌면 의미도 바뀐다.

둘째, 멘토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

4년 동안 내가 만나온 선배 의사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어느 병원 어느 과를 어떻게 가는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료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의사도 있고, 보건 정책을 설계하는 의사도 있고, 저널리즘을 하는 의사도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들을 수 있는 구조가 있다면, 학생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훨씬 넓게 상상할 수 있다. 이건 학교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강연 한 번, 비정기 세미나 하나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수업을 3월에 학사일정으로 픽스되어 공지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들이 원하는 수업과 멘토'를 고르도록 해야 한다.

셋째, 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경진대회 신청서 한 장, 외부 세미나 하나, 생각을 글로 써서 올리는 행위 하나. 이 모든 게 제도 바깥의 틈이고, 그 틈을 나는 스스로 넓혀야 한다. 시스템을 탓하는 것과 시스템의 빈틈을 찾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마치며

나는 아직 의대생이고, 여전히 암기에 쫓기며 살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시스템 위에서 내려다보며 쓴 비평이 아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 안의 한계를 느끼며 쓴 메모에 가깝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내가 스타트업 현장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당황했던 그 경험이, 어떤 강의보다 나를 더 크게 키웠다는 것. 경험은 지식보다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의대라는 공간 안으로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우리 스스로가, 그리고 교육 시스템이 함께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행동하는 한 사람으로 내 자리에서 먼저 움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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